‘퇴근 후 업무 카톡 금지법’ 공허한 메아리
근로자 86.1%, 퇴근 후에도 스마트폰으로 업무 본다
‘공포의 소리’, ‘메신저 증후군’까지 생겨나

[일요서울 | 변지영 기자] 현대인들은 자명종 소리보다 ‘카톡’ 소리로 눈을 뜰 만큼 각종 SNS에 ‘항상 연결(Online)’ 되어 있다. 하지만 공간 제약 없이 언제라도 소통할 수 있는 SNS는 더 이상 직장인에게 편리한 기능만은 아니다. 시간을 불문하고 업무지시를 메신저로 받는 경우가 빈번해짐에 따라 알림 소리만 울려도 스트레스를 받거나 수시로 메신저를 확인하는 ‘메신저 강박증’을 호소하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퇴근 후 SNS로 업무 지시를 할 수 없도록 하는 ‘퇴근 후 업무 카톡 금지법’까지 발의됐다. 이 법안 통과를 두고 찬반 논의가 거세다.
#. 중소기업 K무역회사에 다니는 대리 이모(36)씨는 미국에서 밤이나 새벽에 물건이나 입금 접수건이 바로 요청되면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일주일에 서너 번은 꼭 잠에서 깬다. 그러나 최근 신입 담당 실무자에게 업무처리를 위해 새벽에 전화를 걸거나 메시지를 보내면 답이 늦는 경우가 허다해 불만이다. 마음이 급한 대로 새벽 근무를 직접 처리하게 된 지 4개월째. 후임이 연락을 받지 않으면 모든 매출 책임을 직접 져야 한다. 이 씨 입장에선 피 마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 사원 한모(32)씨는 4개월 전 미국에 화장품을 납품하는 중소기업 K무역회사에 입사했다. 그는 입사한 지 3일째 되는 날 잠을 자다 깜짝 놀랐다. 새벽 3시. 3통의 부재중 전화와 ‘보는 즉시 전화 요망’이라는 직속상사 P 대리가 보낸 메시지가 가득했다. 전화를 걸자 P 대리는 “한 시간 동안 뭐 했습니까! 물건 들어왔는데”라며 그를 닦달했다. 한 씨는 그날의 충격으로 매일 밤 깊게 잠들지 못하고 틈만 나면 메신저를 확인하는 강박증까지 생겼다. 새벽에 오는 메신저 알림으로, 스마트폰 화면에 불이 들어올 때마다 그의 아내가 잠에서 깨고 갓 돌이 지난 아이가 울어 곤혹스럽다. 아내는 밤낮없이 일만 하냐며 바가지를 긁고, 회사에서는 답이 늦다며 쪼아대니 잠적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최근 직장인들이 퇴근 전후를 불문하고 전화·문자메시지·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각종 통신수단으로 업무지시를 받는 사례가 늘어나 근로자의 사생활 침해가 심각한 상황이다. 더불어민주당 신경민 의원은 22일 “모든 근로자는 퇴근 후 ‘연결되지 않을 권리’가 있다”며 퇴근 후 SNS로 업무 지시를 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의 ‘퇴근 후 업무 카톡 금지법’을 대표발의했다. 신 의원은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통해 근로자의 사생활을 존중·보장해 주어야 한다. 시대의 흐름에 맞게 국민의 기본권을 법에 반영하자”며 개정안 대표발의 취지를 밝혔다.
단체카톡방이 오히려 업무 능률 저하시켜
직장인들은 퇴근 후 카톡 업무 지시를 얼마나 받고 있을까? 28일 노동연구원이 전국의 제조업·서비스업 근로자 2400여 명을 설문조사 한 ‘스마트기기 업무 활용의 노동법적 문제’ 보고에 따르면 평일 업무 시간 외 업무 목적으로 스마트기기를 이용한 직장인은 86.1%에 달했다. 하루 평균 약 1.4시간, 휴일엔 1.6시간을 업무처리에 시달린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 체계의 복잡함을 줄이고 ‘즉각적’으로 업무에 대처한다는 목적으로 만든 ‘단체카톡방’ 때문에 쉬는 날도 집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J 마케팅 회사에 다니는 홍모(32)씨는 “카카오톡 덕에 빠른 피드백이나 업무처리가 가능하지만 과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며 “메일로 진행되던 업무조차 카카오톡으로 진행되면서 오히려 카카오톡이 업무에 영향을 많이 준다”고 토로했다. 주요한 전달사항조차 모두 카카오톡으로 전달해 내용을 놓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란 것이다.
이처럼 퇴근 후에도 끊임없이 울리는 SNS 알림소리에 메신저 강박증을 호소하는 직장인들은 “퇴근 후 카카오톡 업무 지시를 없애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근로자들은 “평일·휴일 할 것 없이 5분 대기조로 업무지시를 기다리는 것이 당연한 듯 되었다”며 “법안을 통과시켜 업무 시간에 집중하고 업무 시간 외에는 휴식을 취하면 업무 효율이 더 늘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일각에선 “퇴근 후에도 무리하게 일을 시키는 잘못된 관행들을 법으로만 강제할 수 없을 것”이라는 회의론을 내놓고 있다.
말뿐인 ‘퇴근 후 업무 카톡 금지법’
신 의원의 대표 발의로 ‘퇴근 후 SNS 업무 지시’에 대한 찬반 논의가 뜨겁다.
카카오톡 업무 지시에 시달려온 근로자들은 오죽하면 법을 만들었겠냐며 법안 통과에 찬성하는 입장이지만 대리, 과장급의 입장은 다르다. 경영진 측의 매출 압박으로 사원들은 퇴근 후 연락 받기를 꺼려해 중간에서 악역을 자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개정안이 기업 현실을 모르고 만든 전형적인 ‘탁상공론’이라고 주장한다.
신 의원의 대표발의가 ‘퇴근 후 업무 지시’ 논의를 도마 위에 올려놓았을지는 몰라도 당장 적용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라는 이야기다.
법안은 취지는 좋았지만 상당 부분 구색이 갖춰지지 않은 초안 수준이었다. 처벌 조항도, 위반 여부를 확인할 방법도 명시된 바가 없었다. 법을 어길 시 어떤 처벌을 받는지, SNS로 업무지시를 했다는 사실 확인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전무한 상태다. 또 무역업이나 서버를 유지·보수하는 IT업체 등 24시간 대기하고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아야 하는 특정 업종의 경우 ‘퇴근 후 업무 카톡 금지법’은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의원실은 “이번 법안은 근로자의 사생활이 지닌 중요성을 환기하고, 추가 수당에 대한 논의를 활성화하자는 차원에서 발의된 것”이라며 “추후 논의할 계획은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퇴근 후 업무 지시 가이드라인은 정부가 작성하되 기업과 노사 간 충분한 합의를 통해 각 사업 분야의 성격에 맞는 법안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업·노사 간 합의 통한 가이드라인 필요
해외 사례는 어떨까? 독일 연방정부 내에서도 ‘퇴근 후 업무 지시’에 관한 의견 대립은 여전하다. 유럽은 각 사업장의 성격에 따라 다른 근로기준을 적용하는 편이다. 2012년 독일 금속노조는 연방정부에 근로시간과 휴식시간을 명확히 구분해달라며 ‘안티(Anti)스트레스법안’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논의 중이다. 한편, 독일 폭스바겐은 업무 시간 외 연락을 금지하고 있다. 업무 종료 30분 이후 업무용 스마트폰 서버를 껐다가 다음날 근무 시작 전에 켜지도록 해 애초의 연락 수단을 차단해둔 것이다.
우리나라 기업들도 조금씩 변화를 꾀하고 있다. 올해 4월 LG유플러스는 즐거운 직장 만들기의 일환으로 ‘밤 10시 이후 업무 관련 카카오톡 보내기’를 금기 사항으로 정했다. 이를 어길 경우에는 인사상 불이익을 주는 강경책을 쓰기도 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기선 부연구위원은 스마트기기 등을 이용한 초과근로가 익숙해진 관행을 막기 위해서라도 철저히 추가 근로시간 보상을 지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퇴근 후나 휴일에 스마트기기를 이용한 업무를 근로시간으로 본다면, 사용자는 근로기준법에 따라 통상임금의 50% 이상을 가산해 수당을 지급해야 한다”고 말했다.
bjy-0211@ilyoseoul.co.kr
변지영 기자 bjy-0211@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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