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잔 밑이 어둡다 했던가. 진리는 의외로 가까운 데 있다.” “지식보다 중요한 건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은 우리의 주변에 우리 선조들의 삶과 역사 속에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것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 선조들에게 느끼고 배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요서울]은 저자 김갑동이 쓴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를 통해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을 다룸으로써 누가 옳은 길을 갔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또 인물들을 시대 순으로 배치해 자연스럽게 한국사의 전개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 열 번째로 ‘묘청과 김부식’편이다.
이의민은 경주 출신의 천민이다. 아버지 이선은 소금과 체를 파는 떠돌이 장사꾼이었으며 어머니는 절의 여종이었다. 그는 신장이 8척에 이르고 힘이 장사였다. 그 위의 두 형들도 그에 못지않아 이의민 삼형제는 경주에서 유명한 불량배였다.
이후 이의민은 열심히 군인으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그리하여 사졸로 출발한 그는 분대장에 해당하는 대정이 됐다. 어느 날은 의종 앞에서 수박 (태권도와 비슷한 운동) 시범을 보였는데 이의민의 무술을 본 의종은 대정에서 별장으로 무려 3단계나 승진시켰다. 이처럼 의종의 총애를 받았지만 그는 출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무인정변이 일어나자 이때야말로 자신이 출세할 기회라 생각하고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였고, 명종 3년 김보당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의종을 무참하게 때려죽였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이었다. 그 대가로 그는 대장군이 되었다.
힘으로 출세한 천민 ‘활약’
명종 4년에 일어난 조위총의 난 때에도 그는 맹활약했다. 정동대장군지병마사가 된 그는 조위총의 군사와 맞서 싸왔다. 적이 쏜 화살에 눈이 맞았으나 손으로 화살을 뽑은 그는 그대로 진군하여 적을 대파했다. 그야말로 지독한 인물이었다. 이 모습을 본 조위총의 군사들은 이의민이 출동했다는 소리만 들으면 싸움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꼬리를 감추었다.
이때의 공로로 그는 상장군에 올랐다. 무인정변이 일어난 지 4년 만에 관직으로는 무반 중 최고직에 올랐으나 그가 실권을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이의방이나 정중부 등이 문반직에 앉아 권력을 휘둘렀고 또 천민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이의민은 다른 무인들로부터 질시를 받았다.
경대승이 정중부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자 이의민에게 위기가 닥쳐왔다. 관리들은 경대승에게 다가가 축하하였지만 경대승은 말했다.
“임금을 죽인 자가 아직 살아 있는데 무슨 축하를 받으리오?” 이 말을 들은 이의민은 크게 두려워하여 날랜 용사들을 집에 모으고 병을 핑계 대어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경대승이 죽자 이의민은 정권에 복귀했다. 무반직을 버리고 문관직을 받은 그는 명종 12년에는 동중서문화 평장사·판병부사까지 올랐다. 이처럼 무인 집권자들은 무관직보다 문관직을 선호했다. 무신들이 문신들에 대해 열등감을 가진 탓도 있었다.
이렇듯 재상급에도 무인들이 등용됐으나 이들은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매일 술을 마시고 툭하면 싸움을 벌였다. 추밀원에는 김영존과 손석 같은 무인이 있었으나 서로 다투기를 호랑이 두 마리가 성내어 우는 것 같다고 했다.
중서문하성에는 이의민과 두경승이 있었으나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중서성에 앉아 서로 힘자랑이나 하는 형편이었다. 그러자 일부 지식인들이 시를 지어 이 둘을 조롱하기도 했다.
한편 이의민의 욕심은 점점 더 커졌다. 오색 무지개가 겨드랑이에서 나오는 꿈을 꾼 후 자신도 왕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또 옛 예언에 “왕손은 12대에 끝이 나고 다시 십팔자가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그 십팔자가 자신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경상도에서 일어난 김사미·효심의 난을 은근히 지원하면서 신라의 부흥을 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의민은 지도자감이 아니었다. 인사를 제멋대로 하면서 뇌물을 받고 관직을 주었으며 백성들의 집과 토지를 강탈하는 일이 예사였다. 길을 가다가 예쁜 여인을 보면 납치해 취하고는 했다. 이의민의 처 최 씨는 이를 질투해 여종을 때려죽이고 남종과 간통하기도 했다. 그 자식들도 부모를 닮아 온갖 못된 짓을 하고 다녔는데 그 중 이지영, 이지광이 특히 심해 사람들은 이들을 쌍칼이라 불렀다.
이러한 이의민의 정권이 오래 갈 수는 없었다. 마침내 최충헌과 최충수 형제가 이의민을 죽이기로 모의해 제2의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최충헌의 초명은 최란이요 우봉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상징군 최원호였다. 그가 출세하게 된 계기는 명종 4년에 일어난 조위총의 난이었다. 원수 기탁성이 최충헌을 별초도령에 임명했던 것이다. ‘별초’란 특별히 가려 뽑은 군대란 뜻으로 공격 부대중에서도 최정예 부대였다. 최충헌은 이 부대를 이끌고 선봉에 서서 적을 격파했고 그 공으로 별장에 올랐다.
그 때부터 무반직에 올라 이의민을 제거하기 직전인 명종 26년경에는 섭장군이 됐다. 경대승이나 이의민 등이 단기간에 장군의 직위에 오른 것을 생각하면 아주 늦은 승진이었다. 최충헌을 비롯한 명문 가문의 무신들은 천민 출신들이 권력을 휘두르는 이의민 정권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본디 이의민 자신이 천민이었기 때문에 그의 정권에는 출신이 형편 없는 자들이 많이 고위직에 있었다. 옥을 다듬는 장인의 아들 조원정, 전리 출신의 정방우, 창고 곁에서 쌀을 주워 먹고 살었던 석린 등이었다. 이런 불만이 결국 이의민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으로 드러냈던 것이다.
칼로 일어섰으나 칼로 망하다
거사가 성공하자 최충헌은 이른바 ‘봉사 10조’를 올려 10가지 조항에 달하는 개혁책을 제시했다. 여기에서 그는 지금까지 실정을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이를 시정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 내용은 부정한 벼슬아치를 쫓아낼 것, 청렴한 자를 뽑아 쓸 것, 높은 자리에 있는 벼슬아치들의 사치를 막을 것 등이었다. 이는 자신들의 거사가 정당했음을 내외에 알리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최충헌 본인도 권력의 맛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문·무반의 인사권을 장악한 최충헌은 인사를 마음대로 했다. 그가 관리들의 인사명단을 작성해 올리면 왕은 그대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손님들에게 연회를 베풀 때면 수박시합을 열어 승자에게 즉석에서 교위나 대정벼슬을 주기도 했다. 또 그의 친족들을 요직에 배치해 정권의 보호막을 형성했다.
이의민과 최충헌은 둘 다 무인이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입장의 두 사람은 한 시대에서 대결을 벌였고, 이에 최충헌은 이의민을 제거하고 새로운 정치를 열어보고자 했다. 그러나 그도 결국 무인들이 권력을 전횡하던 기존의 구도를 깰 수 없었고 부패의 일로를 걷게 됐다. 역시 정치는 그 방면의 전문가가 하는 것이 옳다. 무인은 병란이나 전쟁 시에 나라를 지키는 것이 의무이지 정치의 전문가는 아니었다. 때문에 많은 폐단이 속출했던 것이다.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