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잔 밑이 어둡다 했던가. 진리는 의외로 가까운 데 있다.” “지식보다 중요한 건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은 우리의 주변에 우리 선조들의 삶과 역사 속에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것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 선조들에게 느끼고 배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요서울]은 저자 김갑동이 쓴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를 통해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을 다룸으로써 누가 옳은 길을 갔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또 인물들을 시대 순으로 배치해 자연스럽게 한국사의 전개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 열 번째로 ‘묘청과 김부식’편이다.
고려 인종의 시대, 이자겸 세력이 제거됐으나 그 후유증은 컸다. 궁궐이 불타고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으며 개경의 민심도 흉흉해졌다.
왕의 권위도 땅에 떨어지고 인종 3년 군신관계를 강요하는 금나라의 압박도 계속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정치세력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임금이 황제를 칭하여 추락한 왕권을 회복해야 하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 자주성을 높이고 불순한 금나라를 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수도를 서경으로 옮겨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으니 이들이 바로 묘청 일파였다.
묘청이 언제 어디서 어느 가문에서 태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기록이 없다.
다만 서경의 중이었으며 후에 이름을 정심으로 개명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원래 풍수도참설에 능하여 서경의 일관이었던 백수한도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그들은 개경의 지덕이 쇠진하였기 때문에 왕기가 있는 서경을 수도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경 사람인 정지상은 그들의 말을 믿었고 인종도 서경에 행차하여 관정도량을 베풀고 유신정령을 반포하였다.
또 묘청은 내시낭중 김안과 모의하였다. “우리가 만약 임금을 모시고 옮겨가서 서경을 수도로 만든다면 마땅히 중흥공신이 될 것이니 우리뿐만 아니라 자손들에게도 무궁한 복이 될 것이오.”
개혁의 선두에 선 묘청
근신 홍이서·이중부, 대신 문공인·임경청 등도 그 의견에 따라 “묘청은 성인이요, 백수한은 그 다음 가는 성인이니 국가의 일을 그들에게 자문한 후에 시행하고 그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인다면 정사에 득이 될 것이요 국가의 태평을 보존할 것입니다”는 내용의 상소문을 작성해 관원들에게 서명하도록 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서명했지만 김부식과 임원애만이 서명하지 않았다.
묘청 등은 또 건의하기를 “신들이 보건대 서경의 임원역 땅은 음양가들이 이르는 바 대화세의 곳이라, 만약에 궁궐을 세우고 계시면 천하를 합병할 수 있고 금나라가 방물을 바치고 항복할 것이며 36개 나라가 조공을 바치게 될 것입니다”고 했다. 그래서 인종 6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임원역지에 대화궁을 지었고 7년에 대화궁이 완성되자 인종은 또 서경으로 행차하였다. 이 때 묘청의 도당 중에서 어떤 자는 표문을 올려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제정하라”고 권고했으며 또 어떤 자는 금을 쳐서 멸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불가능하다고 여겼고 인종도 듣지 않았다.
왕은 새 궁전의 건룡전에서 신하들의 축하인사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묘청은 정지상·백수한 등과 함께 “방금 임금이 건룡전에 좌정할 때 공중에서 좋은 음악소리가 들렸으니 이것이 새 대궐로 이사 온 데 대한 상서로운 징조입니다”하고는 축하하는 표문을 작성해 모든 재상들에게 서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재상들은 이를 거절했다.
묘청과 백수한은 인종에게 서경으로 행차할 것을 청하였고 왕은 서경으로 행차했다. 서경에 다다르자 검교태사 이재정 등 50여 인이 묘청의 뜻에 맞추기 위해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제정하자는 글을 인종에게 바쳤다. 정지상 등은 이것을 계기로 “대동강에 상서로운 기운이 있는데 이것은 신룡이 침을 토하는 것입니다.
1000년에 한 번 보기 드문 일이니 왕께서 위로는 천심에 답하고 아래로 인심에 따르면 금나라를 제압할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그런데 신룡이 침을 토한다고 한 것은 조작이었다. 묘청, 백수한 등은 남몰래 큰 떡을 만들어 속에 기름을 가득 채우고 작은 구멍을 뚫어 강물 속에 가라앉혔는데 신룡의 침이란 바로 여기에서 나온 기름이었다. 이러한 묘청 등의 책동에 대해 임원애는 왕에게 글을 올려 묘청 무리가 갖은 모략으로 백성들을 현혹하니 이들을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왕은 듣지 않고 서경의 대화궁에 자신의 옷을 두게 하였다. 이렇게 하면 경사가 있으리라는 묘청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그러자 직문하성 이중과 시어사 문공유 등이 상소하여 이르기를 “묘청과 백수한 등은 모두 요망한 자들입니다. 그들의 말이 괴이하고 황당해서 믿을 수 없는데 근신 김안과 정지상·이중부, 환관 유개 등이 묘청의 심복이 되어 서로 칭송·추전하고 그를 가리켜 성인이라 합니다. 또 대신까지도 그들을 믿고 따르는 자가 있어서 전하께서도 의심스러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직한 인사들은 그 자들을 원수처럼 미워하고 있으니 속히 멀리 물리치시기를 바랍니다” 고 했다. 물론 인종은 이 청도 따르지 않고 묘청의 말을 들어 서경에 자주 행차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홍수·한발·푹풍·우박·낙뢰 등의 재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대동강에서 뱃놀이를 할 때 갑자기 폭풍이 불어 인종이 황급히 대피했는가 하면 대화궁 근방 30여 곳에 벼락이 떨어지기도 하였다. 이에 인종도 점차 이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묘청 일파는 그들의 의도대로 서경 천도가 어려움을 알고 무장 봉기를 감행하였다. 인종 13년 묘청은 분사시량 조광, 분사병부상서 유감 등과 더불어 거사하였다. 그는 왕의 조서를 위조하여 막료들 및 각 성의 수장들을 서경의 소금 창고에 가둬버렸다. 그리고 각 성의 병력을 강제로 동원해 인근의 말을 약탈하여 성내로 끌어들였다.
그들은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고 또 그들의 군대를 천견충의군이라 하였다. 그리고 성공했을 때를 대비하여 양부대신과 각 도의 수령들을 모두 서경인들로 임명한다는 문서를 작성해 두었다.
묘청 일파 토벌에 나선 김부식
이에 조정에서는 김부식을 우두머리로 하여 토벌군을 편성했다.
그러나 김부식이 묘청 일파와 대립하는 선봉에 선 것은 정치적 입지 때문이었다. 인종의 외척인 이자겸을 내내 견제해왔던 김부식은 마침내 이자겸이 사라지자 새롭게 인종의 외척이 된 임원애와 손을 잡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이런 마당에 인종이 개경을 버리고 서경으로 간다면 이는 자신의 권력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묘청 등의 주장을 묵살하였고 마침내는 토벌군의 대장이 되었다. 서경으로 출동한 김부식의 토벌군은 1년여 만에 평양성을 점령하고 묘청 일파를 제거했다.
묘청과 김부식, 이 둘은 지금의 어지러운 고려를 어떻게 꾸려나갈지 고민하였다. 그러나 한 쪽은 개혁을 다른 쪽은 보수를 부르짖었다. 묘청은 시대를 바꾸기 위해 새로운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이미 기득권을 갖고 있던 김부식의 반대와 대립으로 좌절했다.
개혁이 무조건 옳다고는 볼 수 없으나 개혁을 통해 숨겨 있던 보수의 일면이 드러나기도 한다. 역시 개혁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 묘청의 예에서 볼 수 있다.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