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서울 | 신현호 기자] 여성 등산객을 상대로 잇달아 잔혹 범죄가 발생하면서 공포감이 확산되고 있다. ‘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홀로 산에 오르는 여성뿐 아니라 산에 오르는 방문자 수가 급감한 모습이다. 등산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던 사패산, 수락산 주변 상인들은 울상을 짓고 있다. 한여름과 겨울을 제외하고는 손님이 꾸준했지만, 최근 갑작스럽게 손님이 줄어 타격을 입고 있고 있어서다. 이번 사건은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사패산 살인사건의 현장검증이 있던 날, 산에서 만난 사람들은 서로를 경계하고 있었다.
16일 오후 12시 30분. 오후 2시에 시작되는 ‘사패산 50대 여성 살인사건’ 현장검증을 보기 위해 사패산에 도착했다. 흉악한 범죄가 벌어진 직후여서인지 등산객은 많지 않았다. 산 입구에는 등산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가게들이 눈에 띄었다. 식당, 등산용품점, 슈퍼마켓 등이다. 점심시간임에도 주변 식당에는 빈 테이블이 많았다. 최근 등산객 발길이 뚝 끊긴 게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설명이다.
한 식당 종업원 A씨는 “손님이 확실히 줄었다. 평일은 몰라도 주말에는 등산객이 정말 많았는데 저번 주말은 발길이 뚝 끊겼다”고 말했다. 사패산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기 10일 전, 인근 수락산에서도 살인사건이 발생한 바 있다. 두 사건 모두 여성 등산객을 노린 잔인한 범죄였다.
A씨는 “여성들이 무서워서 등산할 수 있겠느냐”면서 “이 동네 주민 뿐 아니라 다른 동네에서도 운동 삼아 자주 오던 사람들이 지금은 안 보인다”고 했다.
회룡사에서 사패능선을 따라 현장으로 이동했다. A씨의 말대로 등산객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60대로 보이는 한 남성이 홀로 산에 오르는 걸 봤지만, 회룡사를 방문하는 손님이었다. 사패능선을 통해 사패산으로 가는 1.6㎞ 구간에서 등산객 한 무리와 부부 2쌍, 홀로 산행하는 50~60대 남성 3명뿐이었다. 홀로 산행에 나선 여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사패능선 중간쯤에서 한 부부가 바위에 앉아 이번 살인사건 얘기를 하고 있었다. 부부에게 다가가 심경을 물었다. 박춘선(50대·여)씨는 “혼자서는 절대 산에 못 간다. 누가 날 구해주겠느냐”면서 “요즘 등산객 무리 중에 한 명이라도 남자가 있어야 산에 다닌다고 한다. 여자 혼자는 너무 무섭다”고 말했다.
박 씨 일행인 김모(50대·남)씨는 “실제로 우리가 느끼는 공포는 상당하다”면서 “등산객이 서로 마주치면 경계부터 하게 된다. 예전에는 모르는 사람끼리도 인사하고 했는데 이제는 말을 건네기가 조심스럽다. 산을 즐기는 사람 입장에서는 참 씁쓸한 일”이라고 했다.
당초 지난 15일 예정이었던 현장검증은 비 때문에 다음날로 연기됐다. 기자가 방문한 이날 경찰이 현장 주변을 통제했다. 오후 2시 현장검증이 시작됐다. 피의자 정모(45)씨는 사패산 4부 능선 범행 현장에서 피해자를 상대로 성폭행을 시도한 뒤 목을 졸라 살해한 과정을 담담하게 재연했다.
정 씨가 범행 현장에 나타나자 일부 등산객은 정 씨를 향해 욕설을 했다. 또 분노한 한 시민이 정 씨를 발로 걷어차는 바람에 정 씨가 산을 나뒹구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앞서 정 씨는 의정부경찰서에서 현장검증을 위해 사패산으로 출발하며 피해자와 가족분들에게 “사죄드린다”고 고개를 숙였고, 이 모습을 피해자의 아들이 지켜봤다. 성폭행을 시도했냐는 질문에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자연보호 중요하지만 사람이 우선돼야”
현장검증이 마무리됨에 따라 경찰은 정 씨를 상대로 프로파일러 면접과 보강수사를 진행한 뒤 이르면 20일 정 씨를 검찰에 송치할 방침이다. 의정부경찰서는 지난 13일 사패산 8부 능선에서 휴식 중이던 여성 등산객 A(55)씨를 성폭행하려다 목을 졸라 살해하고 돈을 빼앗은 혐의(강도살인·강간미수)로 정 씨를 구속했다.
정 씨는 경찰에 검거된 이후 피해자의 바지를 벗긴 것에 대해 “피해자가 쫓아오지 못하게 한 것”이라며 성폭행 혐의를 부인해 왔다. 하지만 휴대전화에 대한 디지털포렌식 기법 수사에 덜미를 잡혔다. 범행 전후 수차례에 걸쳐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성인용 동영상을 본 게 확인됐기 때문이다.
또 거짓말탐지기 조사에서 성폭행을 부인하는 정 씨의 반응이 ‘거짓’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경찰은 이를 토대로 정 씨를 상대로 성폭행 여부를 집중 추궁하자 결국 혐의를 인정했다.

박원식 의정부경찰서 형사과장은 “사건 현장에 대한 정밀분석 및 재연 실험을 통한 피의자의 진술상 모순점을 발굴, 이를 집중 추궁한 결과 성폭행을 시도하다 살해하고 금품을 강취했다는 피의자의 진술을 확보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사건 현장이 국립공원관리공단의 관리 대상인 법정탐방로이지만 안전시설물 설치 등 관리규정이 없는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 장소는 등산객이 주로 다니는 정규 탐방로에서 직선거리로 100m가량 걸어 들어와야 해 인적이 드물고, 낭떠러지가 있어 등산객이 추락으로 이어지는 아찔한 사고도 발생할 우려가 높은 곳이다.
이처럼 외지고 사고의 위험이 있지만, 정규 탐방로에서 이 곳으로 들어오는 길목은 안전 줄을 비롯한 위험 안내표지판 등 안전시설물이 전혀 설치돼 있지 않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이 곳이 범행 장소로 이용됐다는 지적이다. 사건현장은 산행이 금지된 비법정탐방로(샛길)가 아닌 국립공원관리공단의 관리 대상인 법정탐방로로 확인됐다.
북한산국립공원도봉사무소 관계자는 관리부실에 대해 “국립공원은 자연 그대로를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 법정탐방로가 관리대상인 것은 맞지만, 자연을 훼손하면서 안전시설물을 설치할 수 없고 그런 규정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경기북부의 한 등산협회 관계자는 “국립공원의 특성상 자연보호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며 “관리 대상이라면 적어도 법적인 관리 규정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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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호 기자 shh@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