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 16 - 숙종과 이자의
[연재]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 16 - 숙종과 이자의
  • 이범희 기자
  • 입력 2016-06-10 20:49
  • 승인 2016.06.10 20:49
  • 호수 1154
  • 50면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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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영원한 화두, 왕위계승

“등잔 밑이 어둡다 했던가. 진리는 의외로 가까운 데 있다.” “지식보다 중요한 건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은 우리의 주변에 우리 선조들의 삶과 역사 속에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것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 선조들에게 느끼고 배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요서울]은 저자 김갑동이 쓴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를 통해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을 다룸으로써 누가 옳은 길을 갔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또 인물들을 시대 순으로 배치해 자연스럽게 한국사의 전개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 열 번째로 ‘숙종과 이자의’편이다. 

인주 이씨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협봉 무렵이다. 현종의 장인으로 김은부가 있었는데 그의 장인이 인주 이 씨 이허겸이었다. 이를 계기로 왕실과 관련을 맺게 된 인주 이씨는 이허겸의 손자인 이자연이 세 딸을 문종의 왕비로 들이면서 강력한 외척으로 떠올랐다. 문종의 뒤를 이은 순종, 선종도 인주 이 씨 가문에서 왕비를 맞았다.

문제는 선종이 죽자 그의 아들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면서 시작됐다. 그가 곧 11세에 즉위한 현종이었다. 그는 나이가 어렸을 뿐 아니라 몸이 병약해서 그의 어머니인 사숙태후가 섭정하였다. 왕의 존재는 유명무실했고 많은 사람들은 얼마 안 가 왕이 죽을 것으로 짐작했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후사도 없었다. 그럼 다음 왕위는 누구의 것인가? 다들 나름대로 다음 보위를 이을 사람을 점쳤다.

왕위 쟁탈전에 끼어든 이자의

이때 나선 사람이 바로 이자의였다. 이자의는 이자연의 손자로서 자신이 누이동생 원신궁주를 선종의 후궁으로 들여보냈다. 거기서 아들을 하나 얻었는데 바로 한산후 윤이었다. 그는 현종의 배다른 동생이며 이자의에게는 생질이었다. 이자의는 자신의 어린 생질을 왕으로 앉히고 자신이 실제적인 권력을 휘두르려 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방해하는 세력이 많을 터 뜻을 이루려면 충분한 힘이 필요했다.

그는 우선 재화를 모으고, 힘세고 무예가 뛰어난 자들을 모아 활쏘기와 말 타기 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때때로 장졸들에게 말했다. “지금 병이 든 주상께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이 때를 틈타 왕위를 노리는 자가 있다. 너희들은 마땅히 힘을 다하여 한산후를 받들어야 한다.”

왕위를 노리는 자라 함은 문종과 인예순덕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선종의 여러 동생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출가한 세 사람 외에도 계림공 희를 비롯하여 상안공 수ㆍ금관후 증ㆍ변한 후 음ㆍ낙랑후 침 등이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미 죽고, 계림공 희만 남아 있었다. 또 인경현비와의 사이에서 조선공 도ㆍ 부여후 수ㆍ 진한후 유도 있었다.

마침내 이자의는 거사의 날짜도 비밀리에 잡아두었다. 그러나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 정보는 금방 새어나갔다. 그런데 이 소식은 선종의 아우들 중 제일 나이가 많았던 계림공 희에게는 오히려 낭보였다. 현종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지금 자신이 가장 유력한 후보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종의 이복동생인 한산후가 있지만 그는 적자가 아니었고 나이도 너무 어렸다. 아니, 애초에 선종이 왕위를 어리고 병약한 아들에게 물려줄 것이 아니라 능력 있는 동생인 자신에게 물려주었어야 했다. 왕은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사리판단을 할 수 있어야 권위가 서는 법이다. 그래서 태조대왕이 남긴 ‘훈요10조’에는 왕의 형제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고 했다. 이미 후사가 없던 순종이 그의 아우인 선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예가 있었다.

계림공 희, 마침내 왕위에 오르다

계림 공에게 지금의 왕위계승은 잘못된 것이었다. 이런 마당에 이자의가 한산후를 왕위에 앉히려는 것은 그를 제거할 빌미를 주었다. 그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즉시 평장사 소태보를 불렀다. “국가의 안위가 재상인 그대에게 달려 있습니다. 지금 일이 급하니 공은 사직을 위해 빨리 이를 도모하시오.”

이를 어찌 할 것인가. 소태보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잘못하면 죽음을 당하는 일. 그러나 이자의보다는 종실인 계림 공을 택하는 것이 명분과 실리 둘 다 챙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는 무관 중 최고위인 상장군 왕국모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왕을 보호하게 했다.

왕국모는 무장이었으나 선종 때에 직문하성을 지낸 바 있었다. 군권을 장악하던 왕국모는 이것이 출세의 기회라 생각하고 재빨리 움직였다. 먼저 힘이 장사였던 고의화를 시켜 이자의를 선정문 안에서 해치웠다.

또 이자의와 같은 무리였던 합문지후 장중, 중추원, 당후관 최충백 등을 선정문 밖에서 죽였다. 군사를 나누어 보내 아자의의 아들 주부 이작과 흥왕사 대사 지소, 장군 승렬?택춘과 중랑장 곽희, 별장 성보, 성국과 교위 노점, 대정 배신 등 17인을 잡아 죽였다.

이들은 이자의의 아들 이작과 친한 무관들로 무력으로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을 없애버린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이자의 편인 조정의 신하들을 제거했다. 평장사 이자위ㆍ소경 김의영ㆍ 사천 소감 황충현ㆍ붕어 황영ㆍ소감 서황ㆍ시어사 왕태소ㆍ자후 이자훈 등 50여 명을 남쪽 변방에 귀양 보냈다.

이들은 이자의에 직접 가담은 하지 않았으나 새로운 정권을 세우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곧이어 이자의의 재산을 몰수하고 이자의 당에 속한 자들의 처자들은 변방으로 내쫓아 관노비로 삼았다. 다시는 정치에 간여하지 못하게 하려는 처사였다. 한산후 윤과 그 어머니 원신궁주는 경원군으로 추방됐다. 현종 원년의 일은 이렇게 끝맺었다.

그러자 현종은 계림 공 희를 중서령에 임명했다. 중서령은 형식상으로는 최고위의 직책이되, 실제 업무는 보지 않는 명예직이었다. 왕의 밑에 있는 사람들 중 최고라는 의미만 가진 것이었다. 그러나 계림공 때는 그 권위가 왕을 능가하였고, 실질적인 권력을 뺏긴 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이를 안 현종도 몇 개월 후 계림공에게 왕위를 넘겼다. 선양의 조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내가 아버지의 유업을 받들어 외람되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나이가 어리고 몸이 허약하여 나라의 권신들을 옳게 통솔하지 못하였고 백성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음모와 책동이 끝없이 일어나며 역적과 난신이 대궐을 자주 침범하였다. 내가 보기에는 숙부 계림공에게로 대세가 기울어져 하늘이 그를 돕고 있는 듯하다. 너희 백성들은 그를 섬겨 국가의 위업을 받들어라.”

그로부터 2년 뒤, 현종은 14세에 죽었다. 이후 숙종으로 즉위한 계림공은 많은 업적을 남겼다. 외척세력을 억제하고 태자의 지위를 강화해 왕실의 위상을 높였다. 또한 대각국사 의천을 통해 천태종을 개창하고, 남경을 경영하였다. 또 주전정책을 실시하고 별무반을 창설하는 등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고 안정된 국가체제를 수립하였다.

숙종과 이자의, 이들 모두는 한 시대에 권력의 중심에 있던 자들이었다. 전자는 종실이었고 후자는 왕실의 외척세력이었다. 하나는 왕이 권력을 쥐고 있어야 정치가 올바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가졌고, 다른 하나는 왕 대신 신하가 정치를 좌우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유교적으로 보면 신하가 왕을 내쫓은 것이요, 인륜을 따지더라도 숙부가 조카를 몰아낸 것이었다. 그러나 숙종의 집권 후 고려의 정치와 제도가 정비되고 발전하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바람직한 지도자상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정리=이범희 기자] skycros@dailysun.co.kr
 [자료제공: 푸른역사, 김갑동 지음]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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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6 09:56:23 121.128.227.249
현종이 아니라 헌종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