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ㅣ고정현 기자] 지금 대한민국은 붕당정치가 판을 친 17세기 조선으로 회귀한 것만 같다. 여야 할 것 없이 모두 당파 이익과 지역 이기주의에 눈이 멀어 있다. 여당은 4·13 총선 전후로 당내 친박(친박근혜)-비박(비박근혜) 진영이 충돌하며 분당 위기에 처한 가운데 또 다른 갈등의 ‘촉매제’가 등장했다. 영남권 신공항 유치 문제가 그것이다. 여당 내 대구·경북(TK)과 부산·경남(PK) 지역 의원들 간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야당까지 TK·PK 싸움이다. 영남권 신공항 문제가 정치권 전체로 번지고 있는 것이다.
-文 “부산 시민, 공정성 우려… 정부는 명백하게 해명해야”
-金 “정치인이 음모론 제기하면 국가적 갈등 관리할 수 있겠나”
새누리당 내 부산 지역 의원들이 내세우는 부산 가덕도와 대구·경북(TK) 의원들이 밀고 있는 경남 밀양을 놓고 정부의 심사가 진행 중이다. 친박과 비박 간 계파 싸움에 분당 위기를 겪고 있는 새누리당이 영남권 신공항이라는 해묵은 뇌관 앞에 다시 서게 됐다. 새누리당으로서는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더라도 '텃밭'이 둘로 쪼개지는 제로섬 게임인 셈이다.
-긴급 당정서 김무성 전 대표만 빠져
이런 가운데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은 갈등 봉합 수순으로 8일 부산시와 여의도에서 당정협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김세연(부산 금정) 부산시당 위원장은 모두 발언에서 “새누리당이 신공항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한다면 부산에서 새누리당에 대한 완전한 지지철회가 있을 것이란 것은 기정사실" 이라고 경고하면서 “(신공항 입지 선정이) 잘못된다면 부산시뿐만 아니라 부산의 여야 정치권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앞서 밀양과 관련해 철새 서식지 파괴, 고정장애물 위험성 등을 입지 부적격 사유로 제시하며 가덕도 유치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현재 진행 중인 용역작업이 공정성과 객관성만 유지된다면 가덕도가 영남 신공항으로 결정될 것이라는 것이다.
반면 대구·경북(TK)은 물론 울산과 경남 출신 새누리당 의원들은 경남 밀양 유치를 위해 지원사격 중이다. 익명을 요구한 TK 지역 의원은 “우리는 입이 없어서 가만히 있는 줄 아느냐"라면서 "정부가 공정하게 (심사를) 하고 있는데 의원들이 그런 식으로 나서면 압력 행사로밖에 비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날 부산 지역 최다선인 김무성(부산 중·영도) 전 대표는 회의에 불참했다. 신공항 입지 선정을 목전에 두고 부산지역 의원들이 전원 참석해 정부를 압박할 계획이었지만 지역 최다선인 김무성(부산 중·영도) 전 대표가 불참하며 김이 샌 모양새다. 김 전 대표 측은 이날 당정에 불참한 데 대해 “원래 참석하기로 한 적이 없다”고 일축했다. 20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지역 예산을 비롯한 다양한 현안을 두루 논의하는 상견례 자리였다고는 하지만 신공항 입지 선정이 목전에 다가온 시점에 이기에 집안싸움에서 발을 빼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영남권 신공항을 둘러싼 지역 갈등이 묘하게 친박과 비박 간 계파 싸움으로 변질됐고 갈등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지고 있다. 부산에서는 평가가 불공정하다며, 새누리당에 대한 지지 철회 얘기까지 나왔다. 이런 가운데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가 후보지 부산 가덕도를 찾으며 신공항 유치 갈등이 야당에 까지 번졌다.
문 전 대표는 이날 부산 강서구 가덕도 신공항 예정지를 찾아 부산시 관계자들로부터 신공항 추진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는 “부산 시민은 입지 선정 절차가 객관적으로 공정하고 투명하게 되고 있느냐에 대해 걱정하고 분노하고 있다”며 “심지어 친박(친박근혜)의 핵심이라고 알려진 서병수 부산시장마저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런 의혹에 대해 명명백백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文 vs 金 대선 맞수 간 전초전
문 전 대표는 밀양과 가덕도 중 어느 곳을 지지하느냐는 질문에 “개인적인 견해를 밝히기는 적절하지 않다”고 답했다. 그러나 “객관적이고 공정하고 투명한 절차대로 용역이 진행되면 부산 시민이 바라는 대로 될 것”이라며 사실상 지지 의사를 밝혔다.
4.13총선 당시 “부산에서 (더민주) 국회의원 5명만 뽑아준다면 신공항 착공을 반드시 이루겠다”고 공헌한 것에 비해 발언 수위는 낮았다. 이는 내년 대선을 준비하고 있는 문 전 대표의 상황 때문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당 관계자는 “노골적으로 가덕도를 지지할 경우 TK 지역의 반발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라며 “당장 더민주당 내부에서도 신공항 부지를 놓고 의견이 엇갈리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했다.
한편 영남권 신공항 입지 선정 문제가 야권 대선 후보 경쟁에도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양상이다. 더민주 내 문 전대표의 대선 ‘맞수’로 꼽히는 대구 수성갑 김부겸 의원이 문 전 대표와 180도 다른 입장을 내놨기 때문이다.
김 의원은 “아직 결론도 나지 않고 전문가들이 심사하고 진행되고 있는 문제에 대해 비전문가인 정치인들이 개입해 먼저 음모론을 제기한다면 앞으로 국가적 갈등관리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며 “정치 지도자면 이럴 때 더욱 신중하게 처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전문성이 떨어지는 정치인들이 공항 문제에 개입해 정치 쟁점화 시키는 것은 갈등만 더욱 증폭시킬 뿐"이라며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선 정치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했다.
또한 그는 “부산에서 정부와 정치권을 압박하는 것은 가덕도가 열세라는 점을 자인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의 고향이 TK인 만큼, TK가 선호하는 밀양이 결국, 신공항 입지로 선정될 거란 상당수 부산 시민들의 의구심을 정면으로 반박한 발언이다.
신공항 유치전으로 여당 내 부산과 대구, 경북 의원들이 맞대결하는 양상을 보이는 가운데 야당 내 집안싸움도 점입가경이 돼가는 모양새다. 여야 모두 신공항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다. 경쟁을 넘어 사생결단 식이다. 어느 쪽으로 결정되든 선정 과정에 경제논리 이외의 것들은 철저히 배제돼야 한다는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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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현 기자 jh0704@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