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잔 밑이 어둡다 했던가. 진리는 의외로 가까운 데 있다.” “지식보다 중요한 건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은 우리의 주변에 우리 선조들의 삶과 역사 속에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것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 선조들에게 느끼고 배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요서울]은 저자 김갑동이 쓴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를 통해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을 다룸으로써 누가 옳은 길을 갔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또 인물들을 시대 순으로 배치해 자연스럽게 한국사의 전개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 열 번째로 ‘목종과 천추태후, 그리고 대량원군’편이다.
문제의 발단은 경종이 26세의 젊은 나이로 죽으면서 비롯됐다. 그에게는 이미 다섯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이들이 졸지에 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꽃이 예쁘면 벌이 날아드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경종의 제4비 헌정왕후 황보 씨는 경종이 죽은 후 왕륜사의 남쪽에서 살고 있었는데 얼마 후 곁에 살던 태조의 아들 안종욱이 그 집을 왕래하다 간통을 해 급기야 임신을 하게 됐다.
뒤늦게 이 사실은 안 성종은 안종욱을 사수현으로 귀양 보냈다. 성종은 안종욱을 귀양 보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하였다.
“숙부,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숙부가 대의를 범했기에 어쩔 수 없어요. 내 후일 다시 부를 것이니 초조해하지 말고 기다리세요.” 한편 달이 차오자 산모는 버드나무 가지를 부여잡고 아이를 낳다 죽었다. 그가 바로 대량원군이었으며 후일의 현종이었다.
성종은 보모를 택하여 대량원군을 길렀다. 아이가 두 살이 된 어느 날 성종이 보려고 부르니 성종을 우러러보면서 아버지라 부르고 무릎 위에 앉아 옷깃을 만지면서 또 두 번이나 아비를 불렀다.
성종이 불쌍히 여겨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이 아이가 깊이 아비를 생각하는구나!” 낳자 마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또한 얼굴도 보지 못했으니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성종은 눈물을 흘리면서 아이를 아버지 곁으로 돌려보냈다.
안종욱은 글을 잘 지었을 뿐 아니라 천문과 지리에도 능통하였다. 그리하여 하루는 대량원군을 불러 금 한 냥을 주면서 말하였다. “내가 죽거든 이 고을 성황당의 남쪽 귀룡동에 무덤을 쓰되 반드시 엎어서 묻어라” 귀룡동은 용이 돌아갈 마을이란 뜻인데 엎어 묻으면 더 빨리 돌아간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용은 곧 임금을 의미하였다. 내 아들이 빨리 개경으로 돌아가 왕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성종 15년 안종욱이 죽자 대량원군은 개경으로 돌아왔다. ‘고려사’에 전해지는 이야기다.
무소불위의 권세를 휘두르다
그러나 한편 대량원군의 수도 입성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것은 헌애왕후였다. 그녀는 헌정왕후의 언니였다. 헌애왕후는 성종이 재위 16년 만에 죽고 목종이 즉위하자 정권을 장악하였다. 목종의 나이 이미 18세가 되었으나 그의 친정을 허락하지 않고 섭정을 하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천추태후라 불리면서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였다. 자신의 힘에 의해 목종이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성종이 죽자 헌애왕후는 혹 동생의 아들인 대량원군이 왕위를 노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성종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이다. 대량원군도 어머니로 따지면 경종의 아들이었다.
때문에 그는 선수를 쳐 자신의 아들인 목종을 왕위에 앉힌 것이었다. 목종이 즉위한 후에도 대량원군은 천추태후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특히 김치양과의 사이에 아들을 하나 낳으면서 미움은 도를 더했다. 김치양은 원래 천추태후의 외가 쪽 친척이었다.
그는 중이 되어 천추궁을 출입하게 되었고 김치양과 천추태후는 결국 불륜관계를 맺었다. 성종은 이 소문을 듣고 김치양을 먼 곳으로 귀양 보냈다. 그러나 목종이 즉위하면서 천추태후는 그를 다시 개경으로 불러들였고 불륜관계를 지속하였다. 마침내 아들을 하나 낳으니 천추태후는 그로 하여금 목종의 뒤를 잇게 하려고 했다.
천추태후는 대량원군이 정치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머리를 깎고 중이 되게 하였다. 처음에는 숭교사라는 절에 보냈다가 목종 9년에는 삼각산 신혈사에 거주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를 신혈소군이라 불렀다. 그래도 김치양과 천추태후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하루는 궁녀를 시켜 독을 넣은 술과 떡을 보냈다. 궁녀가 찾아와 대량원군을 직접 만나려 하자 이를 눈치 챈 그 절의 승려는 소군을 굴 속에 숨겨놓고 거짓말을 하였다.
“소군은 지금 산으로 산보하러 나갔소. 돌아오면 줄 것이니 놓고 가시오.” 궁녀가 돌아간 후 떡을 내버리자 까마귀와 참새들이 그것을 먹고 즉사했다고 한다. 그러는 와중에 김치양의 전횡도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천추태후라는 든든한 배경을 등에 업고 우복야 겸 삼사사까지 오른 그는 친척과 도당을 모두 요직에 배치하였다. 인사권을 장악하고 뇌물을 받아먹으며 3백여 칸이나 되는 호화주택을 짓고 살았다. 자기 고향에는 성수사란 큰 절을 짓고 궁성의 서북쪽에도 시왕사란 절을 지었다.
목종은 그를 외방으로 내치려 했지만 어머니 천추태후의 노여움을 사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부득이 그는 정황을 살피면서 대량원군을 보호하려 애썼다. 대량원군도 나이를 먹으면서 태조 왕건의 손자라는 자부심을 갖고 포부를 키웠다. 그는 모진 고통과 역경을 참고 견디며 후일을 기약하였다.
탐욕스런 권력 추구의 말로
그런데 목종에게 미움을 사 외직으로 쫓겨나 있던 위종정·최창 등은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강조를 죽이기 위해 거짓 왕명으로 부른 것이라고 속였다. 이 말을 믿은 강조는 목종이 죽고 조정이 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세상이 된 지금, 잘못하면 죽음만 당할 뿐이라 생각해 본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왕의 복수를 하고 국가를 보호하라는 편지를 받고 다시 출동했다가 평주에서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죽은 줄 알았던 목종이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안도했으나 늦게 온 것에 대한 문책은 면할 길이 없었고 다시 군사를 돌이킬 수도 없었다. 내친 김에 그는 정변을 단행하여 대량원군을 현종으로 옹립하고 김치양 부자를 살해했다. 목종은 폐위해 충주로 내쳤다. 목종은 충주로 가는 도중 파주 적성현에 이르러 강조가 보낸 자에게 살해당했다. 천추태후는 고향인 황주로 내려가 21년 동안 살다 66세에 죽었다.
한편 강조의 정변으로 고려는 거란의 침입을 맞게 되었고 현종은 나주로 피난가는 신세가 되었다. 목종과 천추태후는 모자 사이였다. 목종과 대량원군은 외사촌형제였으니 천추태후에게 대량원군은 조카였다. 그러나 권력에서 이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이 권력을 탐하지 않았던들 얼마나 행복한 정을 나눌 수 있는 사이였던가? 불륜과 탐욕으로 얼룩졌던 그들의 관계는 목종의 죽음과 천추태후의 귀향으로 끝을 맺었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에 이민족의 침입을 불러들이게 되었다. 권력의 속성과 허무함을 생각하게 해준다.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