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화기 매장 상품에 가려져…인명구조기구함 잠겨 있기도
“안타까운 참사 다 잊었나”…여전한 안전불감증 도마 올라
[일요서울 | 신현호 기자] 하루 수십만 명이 방문하는 서울의 지하상가에서 불이 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고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과거와 같은 참사가 반복될까. 서울 고속터미널 지하상가의 경우라면 ‘대참사’가 예상된다. 최신식 소방시설을 설치해 두고도 정작 화재가 발생하면 무용지물이 될 우려가 높기 때문이다. 그간 수차례 반복됐던 화재사고에도 여전히 ‘안전 불감증’은 심각했다. [일요서울]이 강남터미널 지하쇼핑센터의 소방시설 관리 실태를 긴급 진단했다.
지난 5일 오후 서울 지하철 고속터미널역 ‘강남터미널 지하쇼핑센터’에 도착했다. 이 지하상가는 620개의 상점이 의류와 잡화, 인테리어, 화훼, 휴대폰, 음식 등의 분야로 나뉘어 구역별로 위치해 있다.
이 곳을 찾는 방문객 수는 상당하다. 시설관리공단 집계 기준으로 하루 평균 20만명이 방문한다. 한 군데에서 여러 곳의 물건을 비교해 보고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기 때문에 쇼핑객들의 선호도가 높다. 한여름·겨울에는 특히 붐빈다. 일정 온도가 유지되기 때문에 덥거나 추운 날씨에도 쇼핑을 즐길 수 있어서다. 실제로 기자가 방문한 평일 오후 시간임에도 사람은 북적였다.
유동인구나 지하상가의 규모에 걸맞게 화재 시설은 제대로 갖춰진 듯 했다. 다수의 사람이 오가는 만큼 설비에 주의를 기울인 것 같았다. 그러나 관리상태는 심각한 수준으로 보였다. 소방 전문가가 아닌 기자가 보기에도 고개를 갸우뚱 거릴 만 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먼저 인명구조기구함. 이 캐비닛 안에는 방독면과 방열복, 공기호흡기 등이 비치돼 있다. 화재 발생 시 누구든지 꺼내 입을 수 있도록 설치한 것으로, 대부분의 지하시설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기자는 인명구조기구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노후화 되지는 않았는지 등을 확인하기 위해 문을 열려고 시도해봤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불이 났을 때 꺼내 사용토록 설치 해놓고, 정작 열쇠로 잠가둔 것이다.

아찔했다. 재난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화재 발생으로 연기가 차올라 겨우 숨을 참고 방독면을 찾았지만, 문이 잠겨 꺼내지 못하는 주인공….
이 기구함은 지하쇼핑센터 곳곳에 설치돼 있다. 쇼핑센터의 한쪽 끝에서 반대편 끝까지 설치된 모든 기구함을 열어보기로 했다. 쇼핑센터는 일직선으로 880m에 달한다. 중간마다 지하상가를 관리하는 경비원들이 배치돼 있는데, 보통 이 자리마다 기구함이 설치돼 있었다. 왕복 1시간이 넘는 시간을 들여 모든 기구함을 열어봤지만, 열려있는 곳은 단 하나도 없었다. 유사시 생존을 운에 맡길 수도 없는 셈이다.
다른 소방 시설은 어떨까. 가장 기본적인 소화기와 소화전은 제 위치에 있었다. 소화기의 보존 연한은 5년. 대부분 2012년에 제조된 소화기였기 때문에 내년까지는 사용이 가능하다. 매달 5일에 소화기 점검까지 돼 있었다.
여기까지는 문제될 게 없어 보였다. 그러나 소화기와 소화전을 가리는 일부 점포의 상품들이 문제였다. 큰 불로 번지기 전 불씨를 잡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소화기와 소화전의 일부는 보이지 않는 곳에 꽁꽁 숨어있었다. 겨우 찾더라도 소화전의 문을 열 수 없도록 앞을 진열대로 막아둔 곳도 있었다.
이밖에도 연기를 바깥으로 뺄 수 있는 제연댐퍼 수동조작함, 방재 설비 2단 연동제어기 등도 가려진 곳이 많았다. 이 뿐만이 아니다. 불이 번지는 것을 막는 방화셔터의 경우 셔터가 내려오는 자리에 진열대 등을 놔둔 곳도 있었다. 장애물이 있어 셔터가 바닥까지 내려오기 어려운 상황이다. 소방시설 설치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피난·방화시설 및 방화구획에 물건을 적재하는 행위는 금지돼 있다. 종합적으로 보면, 화재 발생 시 대참사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 지하상가를 관리하는 서울시설공단 측은 관리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서울시설공단 관계자는 인명구조기구함이 잠겨 있는 이유에 대해 “도난의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얼마 전에도 방독면 같은 기구들을 도난당한 적이 있다. 그래서 잠가 놨다”고 말하면서 “유리 부분을 깨서 꺼내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유리를 깨고 꺼내라는 말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오히려 유리 파편으로 인한 부상이 우려됐다. 더구나 내용물의 부피를 감안하면 깨진 부분을 통해 꺼내기도 어려워 보였다.

이에 대해 이 관계자는 “이 인명구조기구는 직원들이 사용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라며 “보통 경비원들이 자리 잡고 있는 곳에 기구함이 설치돼 있다. 열쇠를 경비원들이 가지고 있다. 화재 시 열어서 사용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유리를 깨 사용한다는 처음 설명과 달리 나중에는 직원들이 사용하는 기구라고 말을 바꿨다. 소화기 및 소화전 등이 가려져 있는 데 대해서는 “계속 계도를 하는 데 잘 안 된다. 유동인구가 많은 가운데 물건을 팔다보니까 (상품 진열이) 밀려나와서 그런 것 같다. 지적은 계속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간 수차례 화재로 인명피해를 겪었던 점을 감안하면 여전히 안전 불감증이 심각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화재 참사는 지난 2003년 발생한 대구지하철 화재다. 이 사고로 192명이 사망하고 148명이 부상을 당했다. 방화범과 지하철 관련자 8명이 구속 기소되기도 했다.
지난 1999년에는 유치원생 19명과 인솔교사 및 강사 4명 등 23명이 숨지고 6명이 부상당하는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참사도 있었다. 비교적 최근에도 고양 터미널 화재와 장성 요양병원 화재(2014년), 분당 수내동 상가건물 화재(2015년) 등을 겪었다.
이날 쇼핑센터를 방문한 배효주(29)씨는 “규모도 크고 최근에는 리모델링도 한다고 들어서 당연히 소방 시설도 관리가 잘 되는 줄 알았다. 불나면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죽는 거 아니냐”면서 “안타까운 참사를 많이 겪었지만 화재가 또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지 않나. 방문객들이 마음 놓고 쇼핑할 수 있도록 제대로 관리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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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호 기자 shh@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