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 14 서희와 소손녕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 14 서희와 소손녕
  • 이범희 기자
  • 입력 2016-05-27 19:27
  • 승인 2016.05.27 19:27
  • 호수 1152
  • 51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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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은 칼보다 강하다

“등잔 밑이 어둡다 했던가. 진리는 의외로 가까운 데 있다.” “지식보다 중요한 건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은 우리의 주변에 우리 선조들의 삶과 역사 속에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것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 선조들에게 느끼고 배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요서울]은 저자 김갑동이 쓴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를 통해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을 다룸으로써 누가 옳은 길을 갔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또 인물들을 시대 순으로 배치해 자연스럽게 한국사의 전개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 열 번째로 ‘서희와 소손녕’편이다. 


서희는 이천 서 씨의 명문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 이름은 염윤이었다. 아버지는 고려 광종대에 내의령을 지낸 서필이었다. 서필은 광종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인물로, 서희도 아버지를 닮아 성품이 엄격하고 강직했다.

광종 11년 18세에 과거에 급제한 그는 광평원외랑과 내의시랑 등을 지내고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 국교를 여는 데 앞장섰다. 그의 인격에 감복한 송 태조 조광윤은 검교병부상서를 제수했다. 성종 2년에는 병관어사에 올랐는데 이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소손녕 초조하게 만들다

이후로도 승진을 계속해 내사시랑이 됐다. 그의 진가는 성종 12년 거란이 쳐들어왔을 때 발휘됐다. 이때 그는 중군사였고 시중 박양유는 상군사, 문하시랑 최량은 하군사였다. 이들은 북계에 주둔하며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성종도 스스로 출동해 진두지휘하고자 했다. 그러나 거란의 동경유수 소손녕이 봉산군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려와 성종은 급히 안북부로 돌아왔고 서희는 군사를 이끌고 붕산을 구하려 했다.

그러자 소손녕이 기세등등하게 엄포를 놓았다. “우리 요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다. 그런데 너희들이 경계를 넘어왔으므로 이것을 깨우쳐주려는 것이다. 복종하지 않으면 모조리 없애버릴 테니, 빨리 항복하라” 이때 서희가 성종에게 아뢰었다. “화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싸워보았자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가능하면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개인이나 국가에 좋습니다”

서희의 말이 일리 있다고 생각한 성종은 이몽전을 거란 진영에 보내어 화평을 청하였다. 그러자 기고만장해진 소손녕은 “우리는 80만에 달하는 대병이다. 항복치 않으면 한 사람도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임금과 신하가 모두 나와 항복하라.”

고작 신하 한 사람으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성종은 신하들을 모아 비상회의를 열고 어떻게 대처할지 의논했다. 여러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어떤 신하가 말하였다.
“폐하는 일단 개경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런 뒤에 중신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찾아가 항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어떤 자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

“저들이 원하는 것은 고구려의 옛 땅이니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줘야 합니다. 그리고 황주에서 절령까지를 경계로 삼아야 합니다.” 성종도 어찌할 수 없었다. 적은 80만 대군이었다. 마침내 땅을 떼어주자는 할지론을 따르려 했다. 그래도 순순히 적에게 내줄 수 없다는 일념으로 서경의 쌀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래도 남는 쌀은 대동강에 버리게 했다.

보다 못한 나머지 서희가 나서 아뢰었다. “식량이 충분하면 성도 지킬 수 있고 싸움도 이길 수 있습니다. 싸움의 승부는 힘의 강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적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식량을 버리게 하십니까. 하물며 식량은 백성들이 피땀 흘려 거둔 결실인데 적의 수중에 들어갈망정 헛되이 강물에 버리십니까. 이는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옵니다.”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 성종은 쌀을 버리라는 명령을 중지하였다. 서희는 또 아뢰었다.

“거란의 동경에서 우리 안북부에 이르러 수백 리 땅은 원래 여진족이 살던 곳입니다. 광종이 그것을 빼앗아 거기에 가주·송성 등의 성을 쌓았습니다. 이제 거란이 온 것은 이 두성을 다시 차지하려는 것뿐인데, 고구려의 옛 땅을 가지겠다고 큰 소리 치는 까닭은 우리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땅을 떼어 적에게 주는 것은 만대의 치욕이니 아무리 그들이 병력이 강하다고 하여 서경 이북을 줄 수는 없습니다. 삼각산 이북도 고구려의 옛 땅이니 만약 저들이 또 요구한다면 주시겠습니까? 그것은 신이 군사를 이끌고 한번 더불어 싸운 뒤에 논의해도 늦이 않습니다.”

한편 진지에서 기다리고 있던 소손녕은 초조하고 불쾌했다, 이몽전이 돌아가 자신의 말을 전했건만 아무런 소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실력을 행사하기 위해 군사를 휘몰아 안융진을 쳤다. 그러나 중랑장 대도수와 낭장 유방이 지형지물을 이용해 방어하는 바람에 소손녕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 사람을 보내 다시 항복을 재촉했다.

같은 시기 성종도 전쟁만을 고집할 수는 없었다. 먼저 화평사신으로서 합문사인 장영을 거란 진영으로 보내 화친을 청했다. 소손녕은 이를 선뜻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거만하게 요구했다.
“미관말직에 있는 자를 나에게 보내다니 용납할 수 없다. 다시 대신을 보내 나와 대면하게 하라” 정영이 돌아와 이를 성종에게 전하자, 다시 회의를 소집하고 누가 거란의 진영에 갈 것인지 물었다. 그러나 상대는 80만 대군을 거느린 장수가 아닌가. 모든 대신들이 두려워하며 침묵하는 중에 서희가 앞으로 나섰다. “폐하, 신이 비록 어리석고 부족하나 명령을 받겠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80만 대군이긴 말 한마디

서희는 국서를 받들고 소손녕의 진영에 갔다. 통역하는 자에게 상견례를 어떻게 할 것인지  물어보자 소손녕이 대답했다. “나는 대국의 장수다. 마땅히 뜰 아래에서 절해야 한다” 그러나 서희는 딱 잘라 거절했다. “신하가 군주를 뵐 때는 아래에서 절하는 것이 예이다. 그러나 양국의 대신이 서로 보는데 어째서 그렇게 하겠는가?” 그러나 소손녕도 지지 않았다. 이러한 힘겨루기가 서너 번 왔다갔다 했다.

그래도 소손녕이 뜻을 굽히지 않자 서희는 침소로 들어와 드러누워버렸다. 마음대로 해보라는 배짱이었다. 그러나 국제정세를 환히 꿰뚫어 본 서희는 마음속으로 여러가지 계산을 하고 있었다. 소손녕은 초조해졌다. 사실 이번 침략의 목적은 송나라와 고려의 관계를 끊으려는 것이었다.

고려가 듣지 않으면 무력을 행사하려 했다. 그러나 안융진 전투를 해보니 만만치 않았다.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군신의 예를 행하려 한 것인데 이 또한 상대가 녹록치 않았다. 마침내 그는 자존심보다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 서희가 당에 올라와 대등한 예를 행하도록 하였다. 일단 기 싸움에서 진 것이다. 서희는 마지못해 이에 응하는 척하고 당에 올라 서로 나란히 읍하고 얼굴을 마주 대하였다. 소손녕이 먼저 서희에게 말했다.

“그대 나라가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이다. 그런데 그대 나라가 우리 땅을 점령했고 또 우리와 국경을 접하였는데도 바다를 넘어 송을 섬기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친히 출병한 것이다. 만일 땅을 베어서 바치고 조공을 하면 무사할 것이다.” 그러자 서희가 의연히 말을 받았다.

“아니다.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서 일어났으므로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수도를 세운 것이다. 땅의 경계로 본다면 그대 나라의 동경도 다 우리 경내에 있는 것인데 어찌 국경을 침범했다 하는가? 압록강 안팎 또한 우리의 경내인데 지금 여진이 그 사이를 막아 조공을 바치지 못했다. 만일 여진을 쫓고 우리 옛 땅을 되찾아 요새를 쌓고 도로를 이으면 왜 수교하지 못하겠는가. 장군께서는 나의 말을 당신 나라 임금에게 전하시오.”여기에 고려가 평양에 수도를 세웠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고.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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