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분석] 괄목할 만한 뇌물 전달수법의 발전
금융실명제·5만원권 지폐 등장 변곡점으로 새 수단 등장
[일요서울 | 송승환 기자] 공천헌금 수수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는 국민의당 박준영(70) 당선인(전남 영암·무안·신안)이 홍삼상자를 통해 돈을 전달받은 의혹이 제기되면서 뇌물 전달수법이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상자는 5만 원권 지폐로 약 3000만 원을 담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 불황과 집값 급등으로 목돈을 만져보기 힘든 일반 국민은 갈수록 진화하는 뇌물 전달수법에 혀를 내두르고 있다는 후문이다.
13일 법조계에 따르면 뇌물 전달수법은 1993년 금융실명제 시행을 전후로 크게 달라졌다.
금융실명제 이전에는 뇌물을 주고 받기가 상대적으로 훨씬 수월했다. 차명으로 통장을 만들어 도장과 함께 건네주기만 하면 끝이었다. 혹시나 단속이나 수사에 적발되더라도 뇌물이 누구에게서 전달됐는지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실명(實名)을 통해서만 금융거래를 하도록 한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자 차명계좌를 이용한 뇌물 전달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대신 등장한 것이 이른바 ‘사과상자’를 통한 현금 전달이었다.
1997년에 터진 한보그룹 뇌물사건에서 정태수(92) 한보그룹 회장은 그룹 도산(倒産)을 막기 위해 시중 은행장들과 정·관계 인사들에게 수백억원에 달하는 뇌물을 뿌린 것으로 조사됐다. 이 때 1만 원권으로 2억 원을 사과상자에 담아 전달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세간에서는 한때 ‘사과상자’라는 단어는 ‘은밀한 뇌물’의 대명사처럼 불렸다. 현금 액수에 따라 5000만 원은 일명 ‘007 가방’이라 불리는 신사용 케이스에, 1억 원은 골프가방에 담아 전달했다. 2002년 대선에서는 박스형 화물차량에 돈을 실어 건네는 이른바 ‘차떼기’ 수법까지 등장했다. 당시 한나라당 대선후보의 최측근이 기업들에게 대선자금을 끌어 모으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기업 측이 100억 원이 실린 차량을 고속도로 휴게소에 주차해 놓으면 후보의 최측근이 차를 직접 몰고 가서 받아오는 대담한 방식이었다.
본의 아니게 사과상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나빠지고 노출될 우려도 커지자 새로운 상자들이 대체물(代替物)로 등장했다. 2005년 한국마사회 비리(非理)사건에서는 경북 안동 간고등어 상자와 상주 곶감 상자 등 지역 특산품 상자가 새로운 전달수단으로 떠올랐다.
2009년 6월부터 5만 원권 지폐가 등장하면서 뇌물을 전달하는 상자의 크기도 작아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같은 액수를 1/5 크기로 줄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수뢰(受賂) 혐의로 지난해 7월 기소된 이완구(65) 전 국무총리는 2013년 재·보궐 선거 당시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2015년 사망)에게서 쇼핑봉투에 넣은 3000만 원을 전달받은 혐의로 기소(起訴)됐다. 2014년 발생한 모뉴엘 사기대출 사건에서는 휴지상자나 과자갑, 와인상자 등이 신종 전달수단으로 이름을 올렸다. 또 기프트카드를 넣은 담뱃갑이 사용되기도 했다.
송승환 기자 songwin@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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