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 13- 박술희·왕규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 13- 박술희·왕규
  • 이범희 기자
  • 입력 2016-05-16 08:16
  • 승인 2016.05.16 08:16
  • 호수 1150
  • 5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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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따르는 길, ‘이익’을 따르는 길

“등잔 밑이 어둡다 했던가. 진리는 의외로 가까운 데 있다.” “지식보다 중요한 건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은 우리의 주변에 우리 선조들의 삶과 역사 속에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것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 선조들에게 느끼고 배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요서울]은 저자 김갑동이 쓴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를 통해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을 다룸으로써 누가 옳은 길을 갔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또 인물들을 시대 순으로 배치해 자연스럽게 한국사의 전개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 열 번째로 ‘ 박술희와 왕규’편이다.

박술희는 충남 당진군 면천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체격이 장대하고 용감하였고 두꺼비나 개미를 먹어치울 정도로 식성도 좋았다. 18세로 궁예의 호위병이 되었는데 사실 왕건 덕분에 일을 얻을 수 있었다. 박술희의 고향인 면천은 당시 혜성군이라 불렸는데, 고려의 개국 일등 공신의 복지겸의 고향이며 해상무역의 요지였다. 그러므로 같은 해상 출신인 개성의 왕건이나 태조의 왕비 나주 오 씨와 친밀해 질 수 있었을 것이다.

고려의 우직한 충신 박술희

실제 그는 왕건에게 충성을 다하고, 전쟁터에서는 용감하게 싸웠다. 뿐만 아니라 왕건의 맏아들인 무의 후견인이기도 하다. 무는 912년 태조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태조는 왕위에 오른 지 몇 년 안 되어 무를 태자로 책봉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순조롭지 못했다. 어머니의 집안이 측미하여 반대세력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측미’하다는 말은 신분적으로 미천하다는 의미뿐 아니라 권력이나 군사력이 부족함을 뜻했다.

태조는 태자들이 입는 옷 자황포를 상자에 담아 오 씨에게 주었다. 박술희는 태조의 뜻을 알아차리고 무를 태자로 책봉할 것을 칭하여 마침내 무를 태자의 자리에 앉혔다. 그만큼 태조가 박술희를 깊이 신임한 것이다.
태조 26년 4월, 태조는 임종을 맞아 미리 써두었던 ‘훈요 10조’를 박술희에게 넘겨주며 말하였다. “그대의 힘으로 무가 태자가 되었음을 경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부디 태자를 잘 보필하여 고려를 반석 위에 올려놓으시오.” “알겠사옵니다.”

왕의 마지막 부탁을 받은 박술희는 눈물을 흘리며 굳게 약속했다. 그러나 아무리 왕의 유언이라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태조가 승하한 뒤, 스물다섯 명의 아들들이 모두 왕위계승에 혈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본인보다도 그들의 아버지나 장인 등 친척들의 몸이 바짝 달아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안달이 난 인물이 왕규였다.
왕규는 혜종의 장인이었다. 혜종의 제2비 후광주원부인 왕 씨가 바로 왕규의 딸인 것이다. 그러나 왕규는 이미 태조에게 두 딸을 바친 바가 있어 혜종에게는 장인인 동시에 외할아버지 뻘이었다. 왕규의 딸과 태조가 낳은 아들이 광주원군인데 혜종의 이복동생이었다.

왕규의 원래 이름은 함규로, 광평성의 차관급인 시랑이었다. 후에는 태조 공신이 되었고 왕씨 성을 하사받았다. 강릉의 김순식이나 춘천의 박유가 왕성을 하사받아 왕순식·왕유로 표기된 것과 마찬가지다. 그도 태조에게 총애를 받은 인물로, 태조가 세상을 뜰 때 염상·박수문 등과 더불어 임금의 유언을 받았다. 태조는 정치적으로 우세한 왕규의 딸을 무와 맺어줌으로써 무의 ‘측미’함을 보강해 주려한 것이다.

태조가 승하한 뒤 혜종은 다른 세력의 도전을 받았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신명순성태후 유 씨의 아들인 요·소였다. 이들은 태조의 둘째 셋째 아들로 유긍달의 외손이었다. 이 유 씨는 충주의 호적으로 왕건에게 투항하면서 중앙 정계로 진출하였다. 요·소 등의 충주 유씨 세력은 서경세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혜종보다 더 큰 세력을 가졌으나 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그들이 불만을 품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왕위계승전의 선봉에 선 왕규

이러한 움직임을 눈치챈 왕규는 왕에게 역적이 있을 것이라 아뢰기도 했다. 그러나 세력이 약한 혜종은 그들을 제거하기보다는 회유하려고 해 자신의 딸을 소와 결혼시켰다.
왕규는 이런 혜종의 조치가 불만이었고 장차 자신에게 피해가 올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받았다. 이에 그는 사위인 혜종을 제거하고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처음에는 자객을 왕의 침실로 보냈지만 실패했다. 그 다음에 왕규는 야음을 틈타 직접 무리를 거느리고 혜종의 침실로 들어갔으나 침대는 비어 있었다. 왕규는 순간적으로 계획이 실패했음을 눈치채고 조용히 물러갔다. 혜종은 모두 왕규의 소행인 줄 알았지만 역시 처벌하지 못했다. 왕규의 세력도 무시할 수 없었고 좋든 싫든 자신에게는 장인이었다. 그러던 중 혜종은 병이 들었지만 후사를 결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제1비 진천 임 씨에게서 낳은 흥화랑군을 후사로 삼고 싶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렸다. 그렇다고 처형의 아들이며 장인의 외손이기도 한 광주원군을 후사로 하기에는 첫째 이복동생인 요가 걸렸다.

혜종이 병이 들자 요는 머지않아 그가 죽을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박술희가 반역을 꾀했다고 모함해 그를 갑곳으로 유배 보내 살해했다.
물론 이 때 왕규도 이 일에 암묵적으로 동의하였다. 왕규와 요에게 박술희는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공동의 장애물이었다. 요는 박술희를 제거한 뒤 서경의 왕식렴 군대를 끌어들여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곧이어 마지막 장애물이었던 왕규를 제거하였다. 왕규는 박술희를 제거하는 데 요를 이용했건만 결국 그도 똑같은 칼날에 숨을 거두어야 했다.

처음 박술희와 왕규는 동료였다. 둘 다 태조 왕건의 깊은 신임을 받았을 뿐 아니라 혜종의 후견인이었다. 그러나 혜종이 정치적 위기를 맞자 서로 다른 선택을 했다.

박술희는 우직하게 태조의 유언을 지켜 끝까지 혜종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왕규는 재빨리 이해득실을 따져 자신의 사위인 혜종을 제거한 뒤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왕위에 앉히려 했다. 그래서 마침내 태조의 또 다른 아들인 요·소의 세력을 이용하여 혜종의 측근이었던 박술희를 제거하였다. 그러나 칼날은 다시 돌아와 그 자신도 같은 말로를 맞게 됐다. 현대의 정치나 일상생활 속에서도 이 같은 예는 많다. 인간이 서로 화목하면서 영원히 좋은 길을 같이 갈 수는 없는 것일까. 의보다 이익이 우선시되는 이 세태를 한 번 깊이 생각해볼 문제다.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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