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 12 - 최승우·최언위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 12 - 최승우·최언위
  • 이범희 기자
  • 입력 2016-05-06 21:14
  • 승인 2016.05.06 21:14
  • 호수 1149
  • 5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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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등잔 밑이 어둡다 했던가. 진리는 의외로 가까운 데 있다.” “지식보다 중요한 건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은 우리의 주변에 우리 선조들의 삶과 역사 속에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것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 선조들에게 느끼고 배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요서울]은 저자 김갑동이 쓴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를 통해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을 다룸으로써 누가 옳은 길을 갔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또 인물들을 시대 순으로 배치해 자연스럽게 한국사의 전개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 열 번째로 ‘최승우와 최언위’편이다. 


신라의 지식인들은 주로 6두품 계열이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중국의 당나라에서 유학을 했다. 그들중 대표적인 사람이 이른바 ‘3최’라 불린 최치원·최승우·최언우였다. 이들은 모두 빈공과에 합격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각기 그 행동 양식이 달랐고 미래도 다르게 예측하였다.

최승우는 890년, 당에 건너가 국학에서 3년간 공부하고 893년 빈공과에 급제한 뒤 양섭 아래에 있다가 귀국했다. 그는 신라가 이미 기울었고 부흥은 헛된 꿈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새롭게 등장한 견훤의 휘하에 들어가 견훤을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조언하고 교서를 작성했다.

최언위는 궁예의 뒤를 이어 즉위한 왕건에게 의탁됐다. 그는 885년에 당나라에서 유학해 빈공과에 수석으로 합격한 인재였다. 당시 발해의 재상 오소도가 자신의 아들을 수석으로 하려는 로비를 벌였으나 당에서는 최언위의 실력을 인정해 수석 자리를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42세 때 신라로 돌아온 최언위는 최고 관부였던 집사성의 시링과 서서원의 학사를 지내다가 왕건이 고려를 개국하자 가족을 이끌고 와서 의탁하였다.
신라 말기의 상황을 지켜보던 그는 왕건이 새 시대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새로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이름을 ‘언위’로 바꾸었다. 왕건은 그를 태자의 사부로 임명했고 교서나 외교 문서를 작성하던 기관인 원봉성의 대학사와 한림원의 영을 맡게 했다.

그는 본래 성품이 너그럽고 특히 글씨를 잘 써서 일찍이 최치원이 지은 ‘성주사낭혜화상비’를 비석에 썼다. 고려에 온 뒤에도 모든 궁원의 간판을 썼고 문장도 뛰어나 여러 고승들의 비문을 지었다. 이 때문에 당시에 그를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최승우와 최언위. 이 두 사람의 실력 대결은 태조 10년 공산전투가 끝나고 왕건과 견훤 사이에 오고간 국서를 통해 알 수 있다. 공산전투에서 크게 이긴 견훤은 그 해 12월 왕건에게 국서를 보내 자신의 우위를 과시하면서 왕건을 은근히 위협했다. 이 국서는 물론 최승우가 중국에서 배운 해박한 지식과 문장력을 발휘해서 쓴 것이다.

- 견훤이 왕에게 글월을 보내어 이르기를 (전략) 지난 달 7월에 오월국 사신 반상서가 와서 왕의 조지를 전하기를 ‘경과 고려는 오랫동안 사이좋게 지내어 함께 연맹을 맺어 오다가 요사이 양쪽의 인질이 다 죽으므로 드디어 화친 때의 옛 호의를 잃고 서로가 국경을 침범하여 전쟁을 쉬지 않음을 알았노라. 지금 전사를 보내어 경의 본국에 가게하고 또 고려에도 이첩하니 마땅히 서로 친화하여 길이 평화를 누리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의로존왕을 돈독하게 하고 정으로 사대를 깊이 하는 터이라 조서를 들음에 이르러 곧 삼가 받들고자 하였다. 다만 족하가 군사를 쉬게 하여도 능히 하지 못하고 곤궁하면서도 싸울까 염려하여서 지금 조서를 복사하여 보내니 청컨대 유의하여 자세히 알아둘지어다. 구멍에 든 토끼와 사냥개가 다투다가 서로 피곤하여지면 마침내 반드시 남의 조롱을 받는 것이요 조개와 황새가 서로 맞버티면 또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마땅히 미욱한 고집을 경계할 것이요 스스로 후회를 남김이 없도록 할지어다 -

그는 우선 견훤이 진나라의 장수였던 조적이 외적이 침입하자 채찍을 먼저 잡았듯이 먼저 거병하였음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오월국의 권고를 받아들여 화평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니 이를 받아들이라 하였다. 조개와 황새가 서로 싸워 물고 놓지 않으면 이득을 보는 것은 제3자인 어부이니 어리석은 일이라 했다. 이는 견훤과 왕건이 싸우면 결국 둘 다 망하고 신라만이 이익을 보게 되니 쓸데없는 싸움은 삼가자는 뜻이었다.
이에 왕건은 태조 11년 정월에 후백제에 답신을 보내어 자신의 건재함과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이때 국서를 누가 썼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중국의 여러 고사를 예로 든 것이나 문장의 구성력 등을 보면 최언위 외에는 쓸 수 없는 것이다.

- 이 달에 왕이 견훤에게 답서하기를 (전략) 엎드려 생각하건대 오월국의 조서와 당신의 편지에 대해 말한다면 전자는 비록 감격을 느꼈으나 후자는 혐의의 생각을 금할 수 없기에 지금 사신의 돌아가는 편에 이 글을 부쳐 제때에 옳고 그름을 밝히노라. 나는 전란을 그치게 하고 나라의 재앙을 구하기 바랐던 것이다. 이에 이웃 나라와 잘 사귀어서 어느덧 화친을 맺어 과연 수천 리에서 농업에 즐겨 힘쓰고 7, 8년간 군사들이 한가이 쉴 수 있었다. 족하는 털끝만 한 이익만 보고 천지의 두터운 은혜를 잊어 임금을 죽이고 궁궐을 불태우며 경사를 살육하고 사민을 죽였으며 궁녀들을 빼앗아 수레에 태워갔으며 진귀한 보물을 약탈하여 가득히 싣고 갔으니 그 흉악함은 걸주보다 더하고 그 어질지 못함은 맹수보다 심하도다. -

국서에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조리 있게 표현했다. 최언위는 이 국서에서 견훤이 신라의 왕도를 침입해 왕을 죽이고 백성들을 침탈한 죄를 집중적으로 비난했다. 또 견훤이 신라의 군인으로서 경애왕을 죽인 것은 자식이 제 부모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왕건은 항상 경애왕이 죽은 것을 매우 슬퍼하면서 신라 왕실을 다시 부흥시키기 위해 불충한 자를 토벌하려 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국서를 주고받은 뒤 왕건은 고창군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최언위의 글이 신라인들에게 공감을 얻으면서 그들이 왕건을 도와준 덕택이었다. 최언위는 민심의 동향을 정확하게 파악해 지도자에게 전달했던 것이다. 고창군전투의 승리로 왕건은 확실한 승기를 잡았고 그 후 삼국을 통일해 역사의 주인공이 됐다. 이러한 고려의 후삼국통일에는 왕건 자신의 덕과 군사력이 중요한 요서로 작용했으나 최언위와 같은 지식인의 도움과 전략에 힘입은 바도 컸다. 그는 유방의 모사였던 장량과도 같은 존재였다.

후삼국시대는 우리나라 역사상 흔치 않은 혼란기였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해내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지식인들은 그 자신의 경험과 지식으로 방향을 찾아내야 했다. 또 올바른 지도자를 선택해 백성들을 구제해야 하는 사명도 지녔다. 따라서 지식인은 앞날을 제대로 볼 수 있는 혜안과 사회적인 책임의식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뜻한 바대로 실행할 수 있는 용기가 아닐까?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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