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비마다 책사들 ‘올인 전략’ 빛났다
고비마다 책사들 ‘올인 전략’ 빛났다
  • 이상봉 
  • 입력 2004-04-28 09:00
  • 승인 2004.04.28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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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17대 총선이 끝났다. 열린우리당의 과반수 확보, 한나라당의 개헌저지선 확보, 수 십 년만의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 원내 진출 등 국민은 역사적-정치적 의미를 갖는 절묘한 선택을 했다. 그리고 민주당과 자민련은 사실상 종언을 고했다. 이번 총선은 탄핵 바람부터 시작해서 변화무쌍한 상황 전개가 있었다. 그 승부 상황에서 각 당이 어떻게 대처했고, 막후에서 누가 어떤 전략을 썼는지 공개한다.열린우리당 과반수 의석 확보의 최대공신은 바로 한나라당-민주당-자민련의 ‘탄핵 자살’이다. 선거 초반까지만 해도 사실상 한나라당의 압승이 예상되었다. 왜냐하면 이번 총선에서 드러났듯이 영남인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맹목적인 지역주의’로 똘똘 뭉치는 경향이 있고, 그 결과가 최소한 35%이다. 반면 우리당은 아무리 전국 정당을 지향한다고 하나 사실상 호남지역주의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전국적으로 약 30%에 해당되는 호남표에서 최소한 10%가 민주당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결국 어부지리로 한나라당은 압승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근거로 이번 서울 종로 선거 결과를 들 수 있다. 박진 한나라당 후보가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후보의 균열 속에서 승리한 것이다. 이번 총선은 3·12탄핵 가결 후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서 시작되었다. 한 때 우리당 지지율이 50%를 넘기도 하여 그 대로만 가면 우리당이 200석 이상 얻는 것은 누워서 떡먹기로 보였다. 그러나 최병렬 대표가 사퇴하고 박근혜 대표가 등장하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한나라당 대표비서실 박미영 간사는 민주당 몰락을 설명하면서 “조순형 대표가 끝까지 추태를 보였기 때문”이고 반면 “한나라당은 최병렬 대표가 빨리 물러났기 때문”에 부활할 수 있었다고 설명하나 그게 옳은 것은 아니다.

경상도 지역감정은 결국 최병렬 체제로 갔어도 막판에는 한나라당 손을 들어주었을 것이라는 점이 많은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박근혜 대표가 ‘박정희 향수’를 자극하여 영남표를 결집시켰다고 하나 그건 영남 지역주의에 대한 피상적 견해인 것이다. 영남 지역주의는 호남지역주의와 달리 ‘맹목적’인 것이다. 하지만 민병두 우리당 총선기획단장은 오랜 언론사 기자 생활을 통해 그 누구보다 노련했다. 그는 총선 2주일 전 “최대의 위기 상황이다. 박근혜 대표가 취임하면서 과거의 노골적인 지역감정과 달리 ‘우회적이고 세련된 신지역주의’가 영남을 급속하게 결집하고 있다. 이 상태로 나가면 서울과 수도권도 전멸”이라고 경고음을 날렸다. 그러나 지금 드러난 여론 조사 결과를 보면 그 당시에도 여전히 우리당의 압승이 예상되던 시기였다. 민 기획단장은 위기 의식을 조성함으로써 우리당 지지자의 이탈을 막으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총선 후 만난 민 단장은 여전히 ‘넉살’을 부리고 있었다.

“당시 상황은 정말 비관적이었다. 한나라당의 ‘거여견제론’과 여론 착시 현상에 의한 지지자 이탈, 그리고 새로운 차원의 영남지역주의 때문에 정말로 위기 상황이 도래하고 있었다. 정동영 의장의 ‘노인폄하’ 발언이 문제를 불러일으켰다고 하나 그건 사태의 본질을 모르는 소리이다. 정동영 의장 발언 이전에 이미 영남지역주의는 급속하게 결집하고 있었다”고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따라서 “그런 위기 상황에서 여론조사 결과를 지지자에게 알리려 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정동영 의장 사퇴 논의가 자연스럽게 나왔던 것”이라고 당시의 구체적 상황을 설명했다.

그럼 언제 누가 그런 제안을 했던 것인가? “대구 경북 출마 후보자가 정 선대위장에게 사퇴하라고 한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미 훨씬 전부터 당 핵심부에서 그런 논의가 있었다. 그 과정을 상세하게 확인해 줄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시기만 보고 있었다. 정 의장의 살신성인의 자세가 빛났다. 그래서 탄핵 후 한 달 뒤가 가장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긴박했던 상황을 말해주었다. 여론 조사 결과를 밝힐 수 없는 선거 과정에서 우리당 지도부의 선거 전략의 승리였다. 우리당의 승리요인 중 하나는 여론조사였다. 총선기간 동안 여론조사를 통해 각 후보별 여론추이를 상세히 파악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특히 접전지역은 매일 여론조사를 하다시피하며 여론 추이를 살피기도 했다. 선거 막판에 우리당이 위기론을 들고 나온 것도 여론조사에 기인했던 것이다. 한나라당은 사실 박근혜 대표가 등장할 때만 해도 50석 얻으면 다행이라는 패배적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한나라당에는 조중동 주류 언론과 영남지역주의가 있었다. 그리고 윤여준 선거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이라는 책사가 있었다. 그는 당시 위기 상황에서 “인적 청산을 해야 한다. 당장 천막 당사로 들어가야 한다”고 한나라당 중진 의원과는 질적으로 다른 선거전략을 내놓았다. ‘거여견제론’을 내놓은 것도 그의 아이디어라고 알려져 있다. 한나라당은 이후 선거 막판까지 “우리당이 200석을 차지한다”며 한나라당 지지자들에게 위기론을 확산사켰다.비록 박근혜 대표가 절대로 지역감정에 호소하지 않는다고 했어도 결과는 철저히 영남지역감정에 근거한 ‘절반의 승리’였다. 박근혜 대표 자체가 ‘박정희 딸’이라는 영남 지역주의의 감성을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맹목적 지역감정 앞에서 선거 전략이나 노선, 정책 대안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원내 10석 입성은 어찌보면 이번 총선의 최대의 하이라이트이다. 우리당이나 한나라당이나 사실 본질상 ‘보수정당’일 뿐이다.

비록 그 차이가 제법 크긴 하지만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강령에 ‘사회주의의 장점을 계승 발전시켜’라는 문구가 들어갈 만큼 노동자 농민 서민을 위한 진보정당이다. 따라서 이들의 원내 진입은 향후 한국 정치의 ‘태풍의 눈’이 될 전망이다. 민주노동당 김배곤 부대변인은 “우리는 별다른 전략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우리의 노선과 강령을 국민들에게 전달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선거 과정에서 노회찬, 권영길 같은 토론회 스타가 민주노동당 득표율 제고에 큰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번 민주노동당 원내 진출의 최대 공신은 역시 선거제도의 변화이다. 김 부대변인은 “유권자가 대선과 달리 사표가 되지 않는 정당비례대표에 많이 투표해주었다”고 그 이유를 담담히 설명한다.

하지만 “원래 기대치는 15석이었다”고 힘주어 말하는 모습에서 앞으로 민주노동당의 무한한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민주당과 자민련은 예상대로 거의 전멸했다. 그러나 민주당 추미애 선대위장마저 패배한 것은 다소 의외로 보인다. 민주당은 한나라당과 사사건건 공조하고 심지어 ‘대통령 탄핵’까지 동참함으로써 한나라당을 극도로 싫어하는 호남 유권자에게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게다가 한나라당에서는 최병렬 대표가 우여곡절 끝에 깨끗하게 물러나고 박근혜 대표가 전권을 행사함으로써 지지율을 회복할 수 있었는데 민주당은 끝까지 조순형 대표가 추태를 부림으로써 그나마 남아있던 민주당 지지자들을 실망시켰다.

막판에 추미애 선대위장이 광주에서 삼보일배를 하고, 김홍일 의원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김대중 전대통령에 대한 호남의 향수를 자극했지만 결국 참패를 피할 수 없었다. 호남에서는 영남과 같은 ‘맹목적 지역주의’는 이미 사라졌다는 반증이다. 자민련의 전멸은 이미 예상되었다. 하지만 비례대표 1번으로 나서 10선을 기대했던 김종필 총재가 낙마한 것은 ‘3김 시대’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한다. 자민련은 김종필 총재가 직접 나서 ‘충청도 지역감정’을 호소했지만 ‘행정수도 이전’을 공약으로 내 건 열린우리당의 돌풍을 막을 수 없었다.

이상봉  pneumas@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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