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 11 왕건과 견훤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 11 왕건과 견훤
  • 이범희 기자
  • 입력 2016-05-02 08:22
  • 승인 2016.05.02 08:22
  • 호수 1148
  • 50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도자가 갖춰야 할 자질과 덕목은 무엇인가

“등잔 밑이 어둡다 했던가. 진리는 의외로 가까운 데 있다.” “지식보다 중요한 건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은 우리의 주변에 우리 선조들의 삶과 역사 속에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것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 선조들에게 느끼고 배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요서울]은 저자 김갑동이 쓴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를 통해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을 다룸으로써 누가 옳은 길을 갔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또 인물들을 시대 순으로 배치해 자연스럽게 한국사의 전개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 열 번째로 ‘왕건과 견훤’편이다. 

견훤의 본래 성은 이 씨였으나 뒤에 견 씨라 하였다. 아버지 아자개는 상주 가은현의 농민 출신으로 뒤에 장군이 되었다. ‘이비가기’에서는 진흥왕의 후손인 원선이 아자개라 하였는데 확인하기 어렵다.

‘고기’에는 광주의 북촌에 한 부자가 살았는데 그 딸이 지렁이와 교혼하여 견훤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는 어머니의 가문이 광주 지역의 호족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는 자랄수록 체모가 뛰어났으며 뜻을 세워 경주로 갔다가 서남 해안 지역의 비장이 됐다.

당시 신라왕실의 권위는 바닥까지 떨어졌고 지방은 호족들에 의해 점거당해 반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진성여왕이 즉위하면서 왕의 총애를 받는 몇몇 권신들이 횡포를 부려 정치기강이 문란해졌다.

또 기근이 심해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초적의 봉기가 심하였다. 이러한 때에 견훤이 경주의 서남 주현을 공격하니 이르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호응했다. 마침내 892년에 이르러 무진주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또한 신라서면도통 지휘병마제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 식읍 5천호라고 자칭하고 복원의 우두머리 양길에게 비장이라는 벼슬을 내리는 등 세력확장에 힘썼다.

견훤은 900년 완산주에 순행해 그 곳에 도읍을 정하고 스스로 후백제왕이라 칭했다. 모든 관서와 관직을 정비하기도 했다. 압해도에서 활약했던 수달을 수하에 둔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한편 왕건은 877년 송악에서 태어났으나 20세까지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왕건은 후삼국시대에 궁예가 한반도 중부 지방을 석권, 철원에 도읍을 정하자 아버지와 함께 귀순하여 궁예의 부하가 됐다. 왕건은 궁예 밑에서 충성을 다해 군사활동을 펼쳐 큰 공을 세웠다. 그는 광주·충주·청주 및 당성·괴양 등의 군현을 쳐서 이를 모두 평정, 그 공으로 아찬이 되었고 903년에는 함대를 이끌고 서해를 거쳐 후백제의 금성군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리고 그 부근 10여 개 군현을 빼앗아 나주를 설치하고 군사를 나누어 이를 지키게 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왕건은 점차 궁예와 주위로부터 신망을 얻었다. 그는 그동안 쌓은 전공으로 알찬을 거쳐 시중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 뒤 궁예의 실정이 거듭되자 홍유·배현경·신승겸·복지겸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6월 궁예를 내쫓고 새 왕조의 태두가 됐다.

왕건의 남진정책과 후백제 견훤의 북진정책은 나주 일대에서 충돌했다. 왕건은 나주를 점령해 후백제의 뒤를 위협했다. 바다에서는 왕건이 한 수 위로, 909년 영암의 덕진포전투에서 참패한 견훤은 작은 쪽배를 타고 도망쳐야 했다. 왕건이 왕위에 오른 후 견훤과 왕건의 관계는 한동안 우호적이었다. 견훤은 좋은 부채와 지리산의 대나무로 만든 화살을 왕건에게 선물했다.

기록에는 없지만 왕건도 이에 대한 답례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때 고려와 후백제는 잦은 세력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태조 3년 견훤이 신라의 합천·초계 지역을 공격하자, 신라의 요청을 받은 왕건이 구원군을 보내 서로 신경전을 벌였다. 본격적인 대결은 태조 8년의 조물군전투에서였다.

이 전투에서 왕건 측의 장군 애선이 전사였고 왕건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했으나 승패를 결정짓지 못해 인질을 교환하고 화친을 맺었다.

그러나 다음 해에 후백제의 인질이 병으로 죽자 견훤도 왕건 측의 인질을 죽이고 고려를 공격했다. 이것으로 평화는 깨지고 견훤과 왕건은 또다시 대립을 계속했다. 이러한 대립관계는 태조 10년 공산전투에서 폭발했다. 견훤의 세력이 날로 강성해지자 신라는 왕건과 연합해 대항하고자 했다. 견훤은 927년 근품성을 공격하고 고울부를 습격했다.

이어 경주로 진격해 포석정에서 경애 왕을 살해하고 왕의 사촌 동생인 김부를 왕으로 세웠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왕건이 이를 구하려다 오히려 견훤의 군대에 포위됐다. 이 때 신숭겸이 왕건과 옷을 바꿔 입고 대신 죽음으로써 겨우 목숨을 부지했고 견훤은 909년 해전에서 맛본 패배를 멋지게 복수했다. 그러나 왕건은 몇 년 동안 전열을 다시 가다듬고 때를 노렸다.

그리하여 태조 12년부터 이듬해까지 지속된 고창군전투에서는 왕건이 크게 승리했다. 물론 그곳의 토착세력인 김선평·권행·장길 등의 도움이 컸다. 이 전투의 승리로 강릉에서 울산에 이르는 100여 성이 왕건에게 넘어가 견훤 측은 큰 손실을 보았고 이듬해에는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에 귀순했다. 이후 견훤은 수군으로 몇 차례 공격했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또 후백제는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견훤은 많은 아내를 두어 아들이 10명 있었는데 그 중 넷째 아들인 금강을 특별히 사랑해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다.

금강의 형인 신검·용검 등은 이를 알고 근심하며 지냈다. 양검을 강주 도독으로 용검을 무주도독으로 삼고 신검만 홀로 왕의 곁에 두자 신검은 이찬 능환을 시켜 사람을 강주·무주 등으로 보내 음모를 꾸몄다. 그리하여 953년 3월 금강은 죽고 견훤은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 당했다. 금산사에 석 달 동안 있다가 그해 6월 막내아들 능예, 딸 애복, 첩 고비 등과 함께 나주로 도망치고, 고려에 사람을 보내 의탁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왕건은 기꺼이 맞이하여 백관보다 높은 상보의 지위와 식읍으로 양주를 주었다. 이것으로 왕건의 후삼국통일이 눈앞에 다가왔다.

남은 것은 신검과의 마지막 결전이었다. 왕건은 반역한 자식을 죽여달라는 견훤의 청을 받아들여 태조 19년, 경북 선산 부군의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신검과 일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크게 패한 신검은 황산군으로 달아났고, 왕건군은 이들을 추격해 항복을 받아냈다. 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왕건은 연산에 개태사란 절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로써 후삼국은 고려라는 하나의 나라로 통일됐다.
견훤은 신검을 죽이려 하였지만 왕건은 항복한 그를 살려주었다. 견훤은 분을 이기지 못하다 황산군에 있는 절에서 병으로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다.

역사의 혼란기에 한반도에서 세력을 떨쳤던 결훤과 왕건. 두 사람의 대결은 이렇게 끝을 맺게 됐다. 한 사람은 역사의 승자로서 후세에 영웅으로 남았고 다른 한 사람은 패자가 되어 쓸쓸히 사라졌다 왕건이 승리한 것은 원대한 비전을 가지고 백성들의 요구에 걸맞은 개혁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후삼국을 통일하여 5백년 왕업의 기초를 닦은 고려 태조 왕건은 지도자로서의 인품과 자질이 지금도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났다. 그가 세운 나라, 고려는 후삼국시대의 혼란을 가라앉히고 민족을 통일하여 새로이 나아갈 길을 보여주었다. 현재 우리도 남북통일이라는 국가의 난제에 직면해 있다. 그 통일의 방법이나 과정에 있어 왕건이 취했던 정책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