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추적]옥시, 가습기 유해성 자료 무더기 삭제…증거인멸 의혹
2001년부터 10년치 물질안전보건자료 통째로 증발
검찰, ‘고의 폐기·삭제’ 의심…곧 연구원 줄소환
[일요서울 | 송승환기자]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의 최대 가해업체로 지목된 영국계 제조사 옥시레킷벤키저(옥시)가 제품의 인체 유해 가능성을 적시한 법적 공식 자료를 검찰 수사 직전 삭제한 정황이 포착됐다. 법인 성격 고의 변경, 불리한 실험보고서 은폐·조작 의혹 등에 이어 옥시가 법적 책임을 피하고자 증거를 인멸하는 ‘꼼수’를 부렸다고 볼 만한 또 다른 주요 단서다.

당시 SK케미칼은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MSDS를 첨부해 원료를 공급했다. MSDS는 화학물질의 안전한 사용·관리를 위해 주요 성분과 주의사항 등을 담은 자료다.
SK케미칼이 첨부한 MSDS는 ‘SKYBIO 1125’를 유해물질로 분류하고 먹거나 마시거나 흡입하지 않도록 경고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 MSDS는 일반 문서 또는 담당자 이메일을 통해 제공된 것으로 알려졌다. 차후 민·형사 분쟁이 발생했을 때 옥시 측이 제품의 유해성을 미리 예견했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유력한 단서가 될 자료로 볼 수 있다.
검찰은 올 2월 옥시 본사 등의 압수수색 과정에서 2001년부터 보건당국이 제품 수거와 함께 판매 중단을 명령한 2011년 말까지 10년치의 MSDS를 옥시 측이 통째로 폐기 또는 삭제한 사실을 확인했다. 검찰은 특히 디지털포렌식(digital forensics·‘컴퓨터 법의학’이라 불리는데 전자증거물을 사법기관에 제출하기 위해 휴대폰, PDA, PC, 서버 등에서 데이터를 수집 분석하는 디지털수사과정을 뜻함) 기술을 통해 삭제된 메일을 복구하면서 옥시 측이 검찰 수사가 시작되기 전 고의로 해당 자료를 없애버린 정황을 일부 포착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점을 토대로 검찰은 제품이 호흡기로 흡입되면 인체에 상당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옥시 측이 어느 정도 인지(認知)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검찰은 조만간 2001년 전후 제품 제조에 관여한 옥시 측 연구원들을 불러 MSDS가 폐기·삭제된 경위와 고의 여부 등을 확인할 방침이다. 검찰은 전날 옥시의 인사담당 김모 상무를 참고인으로 소환해 제품 제조·판매와 관련한 의사 결정 및 보고 체계를 상당 부분 확인했다.
검찰은 사태가 불거진 이후 회사를 거쳐간 최고위 인사 가운데 신현우(68) 전 대표이사를 우선 소환 대상으로 보고 있다. 신 전 대표는 동양화학공업 계열사 옥시가 영국계 레킷벤키저에 인수되고 PHMG를 함유한 가습기 살균제를 개발·출시한 2001년 전후로 회사 대표를 지냈다.
“피해자 보호 방관한
정부에도 책임 물어야”
한편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온 환경단체와 학자들이 옥시레킷벤키저(옥시)에 살인죄(殺人罪)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환경보건시민센터는 22일 오전 서울 혜화동 서울대 의대 교육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옥시는 가습기 살균제 원료의 독성 정보가 담긴 물질안전보건자료(MSDS)를 원료 개발업체인 SK케미칼에서 받았으나, 이를 무시하고 이후에도 계속 제품 판매를 했다”며 이 같이 주장했다.
살균제 원료인 PHMG(폴리헥사메틸렌구아디닌)는 질병관리본부가 폐 손상의 원인으로 지목한 물질로, 1994년 SK케미칼이 개발했다. SK케미칼은 PHMG의 흡입에 대한 경고를 담은 MSDS를 옥시에 줬다고 밝혔으나, 옥시는 이를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환경보건시민센터는 “옥시는 심지어 사용자의 피해 호소가 잇따른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으나, 이미 확보한 시장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제품을 판매해 사람들이 죽는 결과를 방지할 기회를 놓쳤다”고 주장했다. 이는 제품의 안전성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것이어서 ‘미필적 고의(未必的 故意)에 의한 살인(殺人)’에 해당한다는 주장이다.
이어 “만약 SK케미칼이 MSDS를 옥시에 넘기지 않았거나, 호흡독성 부분을 부실하게 작성했다면 SK케미칼에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단체는 유럽 기업인 옥시가 가습기 살균제의 안정성을 사전에 확인해야 할 의무를 잘 알고 있음에도, 이를 무시한 것도 살인 고의를 인정할 수 있는 근거라고 주장했다.
유럽에서는 가습기 살균제와 같은 살생물제품의 안정성 증명 책임을 제조회사가 진다. 정부는 제조회사가 안전성을 입증한 경우에만 시장 출시를 허가한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약사법 등에서 규정하는 관리대상 제품만 사전 허가를 받는다. 가습기살균제는 판매된 지 10년이 지난 2011년에야 관리대상 제품으로 지정됐다.
환경보건시민센터는 “옥시는 유럽에서 영업하며 가습기 살균제의 안전성을 사전에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음에도, 한국 시장에서는 규제가 없다는 이유로 이를 무시했다”고 지적했다. 이 단체와 함께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 대해 연구하고 파헤쳐온 전문가들도 기자회견에 참석해 옥시는 물론 정부에 법적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나섰다.
박동욱 방송통신대 환경보건학과 교수는 “2011년 질본 자료에 따르면 옥시 등 제품의 PHMG 농도는 먹는 수돗물 잔류 염소 기준 4ppm보다 1천배 이상 높다”면서 “이처럼 높은 화학물질이 들어간 제품이 어떻게 환경부 유해성 심사에서 걸러지지 않고 판매가 될 수 있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옥시는) 사용자의 건강 위험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미생물을 완벽하게 제거하려고 높은 농도의 살균제(PHMG)를 제품에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박태현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정부는) 유해성 심사에 어떠한 잘못도 없었다고 강변하고, 피해자 보호 문제는 당사자끼리 민사 소송으로 해결하라며 방관해왔다”며 “국가의 책임을 엄격히 따져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옥시는 사용농도 재현 실험의 평균값과 저농도에서 이뤄진 동물실험의 의미없는 결과 중 일부만을 제시하며 문제의 규명이 아니라 왜곡을 시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변지영 기자 bjy-0211@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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