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10- 장보고와 정년 그리고 염장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10- 장보고와 정년 그리고 염장
  • 이범희 기자
  • 입력 2016-04-25 09:19
  • 승인 2016.04.25 09:19
  • 호수 1147
  • 5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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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

“등잔 밑이 어둡다 했던가. 진리는 의외로 가까운 데 있다.” “지식보다 중요한 건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은 우리의 주변에 우리 선조들의 삶과 역사 속에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것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 선조들에게 느끼고 배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요서울]은 저자 김갑동이 쓴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를 통해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을 다룸으로써 누가 옳은 길을 갔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또 인물들을 시대 순으로 배치해 자연스럽게 한국사의 전개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 열 번째로 ‘장보고와 정년 그리고 염장’편이다. 

장보고와 정년. 두 사람은 모두 섬에서 태어난 평민 출신이다. 그래서 바다에는 매우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정년은 오랜 시간 숨을 쉬지 않고 바다 깊이 헤엄치는 재주가 있었다.

두 사람은 또한 어렸을 때부터 싸움을 잘 했다. 그 용맹과 씩씩함은 정년이 장보고보다 한 수 위였지만 나이가 몇 살 아래인 정년은 장보고를 형이라 불렀다. 이 둘은 라이벌이었으나 그들의 우정과 의리는 변함이 없었다. 용맹한 청년으로 자란 이들은 청운의 뜻을 품고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장수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출신 때문에 출세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안 두 사람은 당나라로 건너가서 실력을 인정받아 무령군소장이란 직책을 받았다. 말을 타고 창을 쓰는 무술에는 중국에서도 그들을 대적할 자가 없었다.
그런데 둘의 관계도 점차 벌어지기 시작했다. 출세를 하려면 중국인들에게 잘 보여야 했고, 그러기 위해 자기가 낫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승자는 장보고보다 무예가 윗길인 정년이었다.

결국 장보고는 중국에서 쌓은 경험으로 조국에 봉사하고자 귀국을 결심했다. 신라로 돌아온 그는 흥덕왕을 찾아뵙고 말하였다. “제가 중국에 있을 때 곳곳에서 노비로 고통받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바라건대 청해에 진을 설치하여 해적들이 우리 사람들을 납치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청해는 지금의 완도로 신라의 서울인 경주에서 중국으로 가는 배는 반드시 이곳을 지나야 하는 해로상의 요지였다. 따라서 이 지역을 통과하는 배를 조사한다면 중국으로 팔려가는 신라 백성을 구할 수 있었다. 왕은 흔쾌히 이를 허락하며 장보고에게 군사 1만 명을 내주고 청해진대사로 임명하였다. 이로써 일종의 해상검문소인 청해진이 설치되었고 그의 활약으로 신라인들이 노비로 팔려가는 일이 사라졌다.

물 만난 고기처럼 활약

장보고는 중국으로도 손을 뻗었다. 당시 당나라의 동부 지역에는 신라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다. 자금 산동성의 등주, 강소성의 초주·사주·양주 등지에 있었던 신라방이 그것이다.

당나라는 이 신라인들을 위해 구당신라소라는 특별 행정 기관을 설치하기도 했다. 여기에 책임자를 보통 신라인을 임명하였다. 일종의 자치 단체인 셈이다. 장보고는 등주에 진출하여 법화원이란 절을 세웠다. 이곳은 신라인들의 정신적 안식처요 집회소였다. 또 본국과의 연락 기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곳에 모여 단결을 다지고 본국의 소식을 전해 들으며 향수를 달랬다. 그리고 중국 내 장보고세력의 거점이기도 했다.

이러한 장보고의 활약에 신라왕들은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왕에게 신임을 받은 것은 물론이다. 이처럼 장보고는 신라에 돌아와 정치면이나 군사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따라서 일본인들은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거나 여행할 때 장보고에게 부탁하였다. 일본의 승려 엔니도 당나라에 들어갈 때 장보고에게 부탁하는 편지를 가지고 떠났다는 사실이 840년 2월 17일자 편지에 나와 있다.

이처럼 장보고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외국인들도 공인하는 해상의 패자가 되었다. 반면 중국에 남은 정년은 타국에서 말 못할 고생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남부럽지 않게 생활했지만 본토인들의 시기를 받아 직위를 잃었다. 정년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근근이 입에 풀칠하는 생활을 하였다.

견디다 못한 그는 어느 날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빙원규에게 찾아갔다.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구려. 고국에 돌아가 장보고에게 의탁하려 합니다” 그러자 빙원규가 놀라 말하였다. “여기서 그대와 장보고의 사이가 어떠했는가? 그가 자네를 받아줄 것이라 생각하는가? 어찌하여 일부러 가서 그 손에 죽으려 하는가.”
“추위와 굶주림에 죽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가 만약 나를 원수로 생각한다면 싸우다가 흔쾌히 죽겠습니다. 타국에서 죽느니 차라리 고향에 뼈를 묻겠습니다”

“그대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좋도록 하시오. 대신 후회는 마시게.” 이에 정년도 신라로 돌아가 장보고를 만났다. 예상과 달리 장보고는 정년을 보자 지극히 반가워하며 맞이했다. 오랜만에 둘은 함께 술을 마시며 마음껏 즐겼다. 그런데 이때 희강왕이 자살하고 민애왕이 즉위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에 이곳에 피난와 있던 김우징이 장보고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장보고는 군사 5천을 정년에게 맡기며 그의 손을 굳게 잡고 말하였다. “그대가 아니면 이 난리를 평정할 수 없소.” 정년은 흔쾌히 승낙했다. 지금 그는 자신을 받아준 장보고를 위해서라면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들라 해도 그럴 각오가 되어 있었다. 마침내 정년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가 민애왕을 살해하고 김우징을 새로운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신무왕은 왕위에 오른 지 4개월 만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뒤를 이어 즉위한 문성왕 김경응은 선왕의 약속대로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려 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이 크게 반대하였다. “궁복은 천한 섬 출신이거늘 어찌 그 딸로 왕비를 삼겠습니까?” 이리하여 혼사는 중단되었고 장보고는 크게 노했다. 그가 다시 군사를 일으킬 준비를 하자 조정은 난감해졌다. 장보고를 치자니 패할 것 같고 그렇다고 해서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 때 예전 장보고의 부하였던 장군 염장이 나섰다. “제가 한 사람의 병졸도 쓰지 않고 장보고를 제거하고 오겠습니다.”

정년과 불협화음 빚기도

염장은 본래 장보고의 명을 받고 신무왕을 옹립하는 지휘관으로 출동하였다. 그러나 거사가 성공한 뒤 서울인 경주에 있어야 출세할 수 있을 것 같아 청해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출세를 위해서라면 상관이라도 능히 배신할 인물이었다.

왕은 장보고를 제거하고 오겠다는 염장의 말에 기뻐하며 허락했다. 염장은 청해진으로 장보고를 찾아갔고 이 둘은 술자리를 가졌다. 염장은 빈틈을 노려 술이 거나하게 취한 장보고의 칼을 빼앗아 그를 베었고, 장보고를 잃은 청해진은 무력해졌다. 왕은 염장에게 막대한 상과 아찬의 벼슬을 내렸고 이로써 흥덕왕 말년부터 시작된 왕위쟁탈전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러나 장보고가 죽음으로써 청해진은 붕괴되어 그 찬란했던 영광을 다시는 누리지 못했다.

장보고와 정년. 두 사람은 친구이자 라이벌로서 한때의 경쟁으로 불협화음을 빚기도 했다. 그렇지만 정년이 어려움에 처하자 장보고는 예전의 불편한 감정을 잊고 기꺼이 도와주었고 정년도 은혜에 보답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장보고는 옛 부하 염장의 배신으로 허무하게 생을 마쳤다. 한 사람의 좋은 벗을 만나 기쁨을 누렸으나 한 사람의 악인을 만나 불행을 맛본 셈이었다. 그렇기에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큰 복은 좋은 인연을 맺는 것이라 했던가.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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