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잔 밑이 어둡다 했던가. 진리는 의외로 가까운 데 있다.” “지식보다 중요한 건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은 우리의 주변에 우리 선조들의 삶과 역사 속에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것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 선조들에게 느끼고 배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요서울]은 저자 김갑동이 쓴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를 통해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을 다룸으로써 누가 옳은 길을 갔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또 인물들을 시대 순으로 배치해 자연스럽게 한국사의 전개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 아홉 번째로 ‘김균정과 김명’편이다.
헌덕왕대 김헌창·김범문의 반란으로 표출된 왕실 세력의 분열은 흥덕왕대에 와서 일단락되는 듯했다. 흥덕왕은 많은 친족들을 가리지 않고 정가에 등용했다.
그러나 흥덕왕 10년 김충공이 갑자기 죽자 왕은 사촌 동생인 김균정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시중에는 김충공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김명을 임명하였다. 시중은 형식상으로는 나랏일을 총괄하는 최고 관부의 장관이었으나 실권은 상대등이나 병부령에 미치지 못하였다.
허수아비와 왕을 세우다
특히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세력이 강해진 말기에는 더욱 그러했다. 대신 귀족회의 의장인 상대등의 권한이 제일 강해서 대개 상대등 직에 있었던 사람이 다음 왕위를 계승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흥덕왕이 재위 11년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는 뒤를 이을 아들도 없었고, 다만 즉위 2개월 만에 죽은 왕비와 합장할 것을 유언했을 뿐이었다.
후계자에 대한 유언은 없었으나 관례로 볼 때 다음 왕위는 상대등 직에 있었던 김균정에게 돌아가야했다. 그러나 시중직에 있던 김명이 반발하고 나섰고 귀족들도 두편으로 갈라져 싸우게 되었다. 당시 김균정은 아들 우징을 비롯한 김예정·김양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반면 김명 편에는 아찬 이홍·배휜백 등이 가담했다.
이런 가운데 김균정이 왕으로 추대되어 적판궁에 들어가자 김명·이홍·배휜백 등은 궁궐을 포위하였다. 드디어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김양은 화살에 맞아 김우징과 함께 달아나고 김균정은 죽임을 당하였다. 승리한 김명은 김균정의 조카이며 자신의 매부인 김제융을 왕으로 추대했으니, 그가 곧 희강왕이었다. 그러나 희강왕은 어디까지나 허수아비였고 실권은 김명이 쥐고 있었다. 김명은 빨리 희강왕이 자신에게 왕위를 물려주길 바랐지만 3년이 지나도록 희강왕은 왕위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제는 무력으로 왕위를 빼앗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김명은 시중 이홍과 결탁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궁궐을 침입해 닥치는 대로 왕의 수하들을 죽였다. 초저녁에 잠들었던 희강왕은 비명 소리에 화들짝 놀라 깼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내관은 속히 알아오도록 하라” 어명에 따라 밖으로 나갔던 내관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 들어왔다. “전하! 지금 김명과 이홍이 합세하여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지금 이쪽으로 군사들이 몰려오고 있으니 속히 피하십시오!”
희강왕은 크게 놀랐으나 모든 것은 예상한 일이기도 했다. ‘왜 진작 왕위를 내놓지 못했을까. 내가 어리석었구나.’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희강왕은 마침내 자신의 허리띠를 풀어 궁궐의 서까래에 매고 자살하였다.
복수의 씨앗이 잉태되다
이로써 김명이 민애왕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의 나이 겨우 22세로 어린 나이에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오르니 모든 천하를 손에 쥔 듯 기세등등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복수의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김명 일파에게 패했던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은 완도의 청해진으로 가 장보고에게 의탁하였다. 그가 시중직에 있었을 때 청해진을 설치하는 장보고를 도와준 적이 있어 그 때의 인연을 믿고 온 것이었다.
아찬 예징과 양순이 뒤를 이었고, 김양도 군사를 이끌고 완도로 왔다. 김양에게서 김명이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김우징은 장보고를 돌아보며 비장하게 말했다. “대사! 내게는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갈 수 없는 원수가 하나 있고. 대사가 만약 나를 도와준다면 내가 왕위에 오른 뒤에 대사의 딸을 태자비로 삼겠소. 도와주시오!”
장보고는 말을 받았다. “고인의 말에 분하고 불쌍한 일을 보고도 나서지 않는다면 용기 없는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제 비록 재주와 용맹이 없으나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그는 군사 5천을 친구인 정년에게 주면서 거사를 주도하도록 하였다. 형식상의 지휘관은 김양으로 염장·장변·정년·낙금·장건영·이순행 등 여섯 장군을 거느리고 무주 철야현에 이르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민애왕은 깜짝 놀라 대감 김민주를 시켜 이들을 막게 하였다. 그러나 청해진의 훈련된 군사를 막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김양은 김민주의 군대를 거의 섬멸하고 사기가 충전하여 대구 근처까지 이르렀다. 김민주가 패했다는 소식과 김양이 진격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민애왕은 몸을 부르르 떨며 외쳤다.
“경들은 무엇들 하고 있느냐? 어찌 이렇게 쉽게 패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이찬 대흔·대아찬 윤린·의훈 등에게 군사를 이끌고 막게 하였다. 그러나 김양의 군사는 이를 맞아 대승을 거두었고 민애왕의 군사는 반 이상이 죽어넘어졌다. 민애왕은 궁궐의 서쪽 언덕에서 이 전투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왕의 군대가 패하자 신하들은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 달아났다. 혼자 남은 민애왕은 가까스로 별궁인 월유택으로 달아났으나 뒤따라온 군사에게 살해당하였다. 왕위에 오른 지 채 1년도 안 되었을 때였다.
민애왕의 뒤를 이은 신무왕 김우징은 곧바로 자신의 아들 경응을 태자로 삼고, 청해진 대사 장보고를 감의 군사로 세워 식읍 2천호를 맡겼다. 그러나 이 역시 채 7개월도 되지 않아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본디 김균정와 김명은 숙부와 조카 사이였다.
그러나 조카가 정상적인 왕위계승을 뒤집고 쿠데타를 일으켜 숙부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장보고의 세력을 등에 업고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에 의해 제거 당했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그 때문에 피를 나눈 사람들끼리 치열하게 싸웠다. 그런데 그를 통해 얻은 것은 무엇인가? 결국 이들의 싸움은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불러왔을 뿐 아니라 한 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기여했을 뿐이다. 권력이란 나라를 세우는 데 없어서는 안 되지만 이를 지나치게 탐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