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수원화성 방문의 해] “화성행궁에서 정조의 효를 가슴에 품다”
[2016 수원화성 방문의 해] “화성행궁에서 정조의 효를 가슴에 품다”
  • 수도권 강의석 기자
  • 입력 2016-04-15 19:15
  • 승인 2016.04.15 19:15
  • 호수 1146
  • 5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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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478호 화성행궁
▲ 행궁 전경

[일요서울 | 수도권 강의석 기자] 사적 제478호 화성행궁은 1789년(정조 13년)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 됐다. 행궁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 휴양, 능원 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해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하며 그 용도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 내의 광주부행궁 등이 있고 온양행궁은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으로 조선 세종이래 역대 왕이 즐겨 찾던 곳이다. 그리고 왕이 지방의 능원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이 바로 화성행궁이라 할 수 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으며 1790년에서 1795년(정조 14∼19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했다. 그 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뽑히는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부 유수가 집무하는 내아로도 활용했다.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을 거행했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했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 1년(1801년) 행궁 옆에 화령전을 건립해 정조의 진영을 봉안 했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화성행궁은 576칸으로 정궁 형태를 이루며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낙남헌을 제외한 시설이 일제의 민족문화와 역사 말살 정책으로 사라졌다. 1980년대 말, 뜻있는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꾸준하고 적극적인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돼 마침내 482칸으로 1단계 복원이 완료됐다. 2003년 10월, 일반에게 공개 됐다. 

신풍루
신풍루는 화성 행궁의 정문으로 1790(정조 14)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라고 했다.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해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했다.

▲ 신풍루
‘신풍’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1795년 을묘 행차 시에 신풍루 앞에서는 정조가 친히 참석하여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끓여 먹이는 진휼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봉수당
봉수당은 화성 행궁의 정전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이라고도 한다. 1795년(정조 19)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했다. 이 때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의 수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했다.

▲ 봉수당
이 건물은 원래 1789년(정조 13)8월 19일 상량하고 9월 25일 완공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파괴된 봉수당은 1997년 복원 됐다.

경룡관
경룡관은 장락당의 바깥문으로도 사용한 부속 건물이다. ‘경룡’이란 제왕을 상징하는 큰 용을 뜻하는 것으로 당태종이 거처한 궁궐 이름에서 따 왔다.

▲ 경룡관
정조는 당태종의 궁궐 이름을 차용한 이 건물에서 휴식을 취하며 조선의 태평성세를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1794년(정조 18)에 세워진 경룡관을 2층 구조로 건물의 2층은 모두 마루를 깔아 누마루를 만들고, 아래층은 3칸의 널문을 만들어 ‘지락문’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장락당
장락당은 1795년 을묘원행 중 혜경궁의 침전으로서 1794년(정조 18) 화성 성역 중에 완성되었으며, 봉수당 남쪽에 있는데 봉수당의 서남쪽 지붕과 겹쳐 있으며, 동향으로 세워졌다.

▲ 장락당
장락당은 전한의 도읍인 장안성의 궁전이었던 장락궁에서 이름을 따 왔다.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기원했던 정조는 한나라 태후의 거처였던 장락궁의 이름을 따 행궁의 내전인 장락당의 편액을 직접 써서 걸었다. 실제로 1795(정조 19) 을묘원행 시에 혜경궁은 이곳에서 머물렀는데 정민시가 지은 상량문에서는 ‘빛나는 궁궐이 처음 이루어지는 때를 당해 다행히 태후께서 먼저 납시는 것을 보았네’라고 했다.

복내당
복내당은 행궁의 내당(內堂)으로 정조가 행차시에 머물렀던 곳이며 장락당 남쪽에 위치하였다.
상량문은 1796년(정조 20) 11월 민종현이 지었다. 복내당의 이름은 '복은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원래 복내당은 1790년(정조 14)에 수원부 신읍치소의 내아(內衙)로 건립하였고, 1794년(정조 13)에 세웠다. 좌우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노래당
노래당은 정조가 왕위에서 물러나 노후생활을 꿈꾸며 지었다는 건물로 낙남헌과 득중정에서 펼쳐지는 여러 행사 도중 휴식을 취하는 데 사용했다. 화성 행궁의 정당인 봉수당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나오는데, 곱은 ㄱ자형으로 배치한 초익공 양식의 팔작지붕집이다.
1794년(정조 18) 행궁을 증축할 때 5량 7칸의 규모로 새로 지었으며 편액은 채제공이 썼으나 전하지 않는다. 북쪽으로는 낙남헌과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득중정과 통한다. 노래란 말은 ‘늙는 것은 운명에 맡기고 편안히 살면 그곳이 고향이다’라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낙남헌
낙남헌은 일제강점기에 화성행궁이 철거될 당시 훼손당하지 않고 남아있는 건축물중 하나다.
낙남헌이란 이름은 후한의 광무제가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궁궐 이름을 '남궁(南宮)'이라 한 것에서 따온 것으로 1794년(정조 18)에 완공됐다.

▲ 낙남헌
1795년(정조 19)을묘원행시에는 각종 행사가 이 곳 낙남헌에서 치러졌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념하여 군사들의 회식을 이 곳에서 하였으며, 특별과거시험을 치러 문과 5명과 무과 56명을 선발 하였는데 급제자에게 합격증을 내려 주는 행사도 이 곳에서 있었다. 또한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을 기념한 양로연을 시행 했다.

득중정
득중정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로 편액을 정조가 직접 써서 걸었고, 상량문은 홍양호가 짓고 썼다. 정조는 행차 시에 매번 활쏘기를 하였는데, 1790년(정조 14)에 새로 만들어진 이 정자에서 활을 4발 쏘아 4발 모두 맞히고는 이를 기념해 ‘득중정’이라고 한 것이다.
득중정은 “활을 쏘아 맞으면 제후가 될 수 있고 맞지 않으면 제후가 될 수 없다”라고 한 구절에서 ‘득’자와 ‘중’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미로한정
미로한정은 행궁 후원(後苑)에 만든 정자이다. 후원 서쪽 담 안에 있었는데 미로한정이라는 말은 ‘장래 늙어서 한가하게 쉴 정자’라는 뜻이다. 노래당과 함께 갑자년(1804)에 세자에게 양위하고 화성으로 가리라던 정조의 뜻이 담긴 이름이었다.

▲ 미로한정
1790년(정조 14)에 세워 졌는데 1칸 6각정으로 ‘육면정’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는 수원 추팔경의 하나인 한정품국(국화꽃 벌여놓고 황상하는 미로한정의 가을 풍경)의 경관이 연출되기도 했다.

유여택
유여택은 평상시에 화성유수가 거처하다가 정조가 행차 시에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는 건물이었다. 유여택은 복내당 동쪽 행각과 외정리소 사이에 있다. 유여택이라는 이름은 '시경' 중에서 주나라 천명을 받아 나라를 크게 하고 집을 주었다는 데서 따온 것으로 정조의 입장에서는 화성 유수를 임명하여 내려보내는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 유여택
원래 유여택은 1790년(정조 14)에 건립하고 은약헌이라 했다가 1796년(정조 20)에 증축하면서 유여택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건물은 동향으로 왼쪽에 공신루 1칸을 덧붙여 휴식 공간을 마련했다.

외정리소
정리소는 장차 1795년 을묘원행에서 펼쳐질 각종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1794년 12월에 설치한 임시 기관이었는데 화성 성역이 끝난 후 외정리소라 해 정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이 행차할 때 화성 행궁에서의 행사 준비를 담당하는 관청이 됐다. 외정리사는 호조판서가 겸임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화성의 경우는 화성 유수가 겸직했다.

서리청
서리는 문서의 기록 및 수령, 발급을 담당하는 아전으로서 서리청은 그들이 사용하는 건물이다. 비장청 앞에 위치했으며 남향이다.

▲ 서리청
예전의 금도청건물을 이청으로 쓰게 하고 그 건물을 증축해 사용했으며 1795년 을묘원행 시에는 수라간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집사청
집사는 주인을 모시고 그 살림을 맡아하는 사람들로서 행궁의 집사청은 궁궐의 액정서(국왕이 쓰는 붓과 먹, 벼루 등을 보관하며 대궐안의 열쇠를 간수하고 여러가지 설비, 비품을 관리하는 관청)와 같이 잡다한 사무를 보던 집사들이 사용하던 건물이다.

남군영
남군영은 장용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가 좌·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 숙위하는 건물이다.
신풍루 좌우에 있는데 1789년(정조 13)에 처음 지었고, 1794년(정조 18) 좌우에 익량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1798년(정조 22) 장용외영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좌, 우열은 파하고 1,2,3번의 입번 순서를 정하여 매년 각 100명씩 양 군영에 나누어 배치했다.

▲ 남군영

북군영

북군영은 장용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이 좌·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 숙위하는 건물이다. 신풍루 좌우에 있는데 1789년(정조 13)에 처음 지었고, 1794년(정조 18) 좌우에 익량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1798년(정조 22) 장용외영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좌, 우열은 파하고 1,2,3번의 입번 순서를 정하여 매년 각 100명씩 양 군영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비장청
비장은 관찰사나 절도사등 지방관이 데리고 다니던 막료로 조선 후기에는 방어사를 겸한 수령까지 모두 비장을 거느리는 것을 관례화하여 민정 염탐을 시키기도 했다. 비장청은 화성 유수부의 비장들이 사용하던 건물로 외정리도 앞에 있는 남향 건물이다.

▲ 비장청
원래는 1789년(정조 13)에 세웠는데 1796년(정조 20)에 서리청 건물을 수리하고 비장청으로 변경하여 사용하였다.

화령전
화령전은 사적 제115호로 1801년(순조 원년) 정조대왕의 유지를 받들어 화성행궁 옆에 세운 정조의 영전이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위를 모신 사당과는 달리 영전은 보통 선왕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생전에 계실 때와 같이 봉안하는 곳이다.

▲ 화령전 정조어진

kasa59@ilyoseoul.co.kr

수도권 강의석 기자 kasa59@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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