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잔 밑이 어둡다 했던가. 진리는 의외로 가까운 데 있다.” “지식보다 중요한 건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은 우리의 주변에 우리 선조들의 삶과 역사 속에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것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 선조들에게 느끼고 배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요서울]은 저자 김갑동이 쓴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를 통해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을 다룸으로써 누가 옳은 길을 갔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또 인물들을 시대 순으로 배치해 자연스럽게 한국사의 전개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 여덟 번째로 ‘김경신과 김주원’편이다.
선덕왕대 권력의 제2인자는 김경신이었다. 그는 선덕왕 김양상과 함께 혜공왕을 타도하였기 때문이다. 많은 신하와 사병들은 그의 휘하에 몰려들었다. 그러나 김양상이 거사하기 전 시중직에 있었던 김주원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었다. 거사가 없었다면 사실 왕위는 김주원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김주원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의 5대손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무열왕의 셋째 아들인 문왕의 5대손이라고 한다. 그는 777년 이찬으로 시중에 임명되었다. 시중직에서 퇴임한 것은 혜공왕이 살해되고 선덕왕이 즉위한 780년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그 뒤에는 병부령을 지냈던 것으로 보아 그의 세력이 막강했던 듯하다.
785년 선덕왕이 죽자 왕위계승을 놓고 다툼이 벌어졌는데 그가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삼국사기’에 “선덕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군신들이 의논해 선덕왕의 족자인 김주원을 추대하려 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귀족들이 그를 왕위에 추대한 배경은 선덕왕과 친족관계이기보다는 실질적인 세력관계 때문이었다. 그는 당대의 실력자로서 여러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그에 비해 김경신은 선덕왕의 즉위와 더불어 세력을 잡아 상대등에 올랐지만 실제 세력 면에서는 시중직에서 물러난 김주원에게 오히려 뒤지고 있었다. ‘삼국유사’ 원성대왕조에 “이찬 김주원이 상재이고 각간 김경신은 이재로 있었다”라고 한 것도 당시 김주원이 세력 서열에서 일인자였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는 귀족회의에서 당연히 공식적인 왕위계승자로 추대될 수 있었으나, 김경신의 정변으로 즉위는 실현하지 못하였다. 즉 김경신은 왕위 계승의 원칙이 흔들리고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비상수단을 써 왕궁을 점거하고 왕위에 오른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김주원을 지지하던 귀족들도 등을 돌리고 말았다.
‘삼국유사’에서 “왕(김경신)이 먼저 왕궁에 들어가 즉위하니 상재를 지지하던 무리들이 모두 왕에게 붙어 새로이 등극한 임금에게 배하하였다”고 하였다. 그렇다며 어떻게 김경신은 막강한 라이벌 김주원을 제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김경신은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다. 꿈에 그가 복두를 벗고 흰 갓을 쓰고 열두 줄 가야금을 든 채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깬 뒤에도 꿈은 잊히지 않고 생시처럼 생생했다. 그는 해몽을 잘 하는 사람을 불러 꿈 이야기를 하였다. 불려온 사람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였다. “죄송하나 이는 흉몽인 것 같습니다. 복두를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요 가야금을 든 것은 죄수들이 쓰는 칼을 쓸 징조입니다. 또 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감옥에 갇힐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내심 김주원을 제거하고 왕이 되려는 마음을 품고 있던 김경신이었지만 이런 불길한 해몽을 듣자 기가 꺾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 그는 외출을 삼가고 두문불출했다.
이때 아찬 여삼이란 자가 있었다. 남몰래 야망을 품고 있던 그는 김경신의 측근에게서 꿈 이야기를 듣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기회는 노력하는 자에게 오는 것, 그렇게 생각한 그는 당장 김경신의 집으로 찾아갔다. 김경신은 처음에는 만나는 것을 거절했으나 여삼이 두 번 세 번 간곡히 청하자 마지못해 허락하였다.
“공께서 요즈음 통 조정에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어쩐 일이십니까?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한참을 고민한 끝에 김경신은 자신이 꾼 꿈과 이를 점쳤던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자 여삼은 크게 손뼉을 치면서 말하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도 꿈 해몽에는 일가견이 있지만 이는 분명 길몽이옵니다. 공이 만일 왕위에 올라서도 저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공을 위해 꿈을 풀어보겠습니다” 그가 푼 해몽은 다음과 같았다. “복두를 벗는다는 것은 이제 신하의 위치에서 벗어나 더 이상 윗사람이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흰 갓은 면류관을 쓸 징조요 열두 줄 가야금을 든 것은 12대손이 왕위를 물려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공이 바로 내물왕의 12대손이 아니옵니까” 또한 천관사 우물은 “일반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궁궐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그러하니 이 어찌 길몽이 아니겠습니까”
그럴 듯한 해석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시원치 않은 구석이 남았던지라 김경신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김주원이 있는데 어떻게 내가 왕위에 오른단 말인가” “왕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 하늘이 알아서 할 터이니 공께서는 북천의 수신에게 제사만 잘 지내십시오.”
여삼의 해몽에 김경신은 반신반의하였지만 그다지 나쁘지 않은 제안인 듯하여 그의 말을 따랐다. 얼마 안 있어 선덕왕이 승하하고 사람들은 김주원을 왕으로 맞으려 했다. 그런데 왕의 즉위식 바로 전날 장대같은 소낙비가 쏟아져 북천의 냇물이 크게 불었다. 북천의 복쪽에 사는 김주원은 시간에 맞춰 올 수 없었고 그동안 여삼이 포섭해놓은 김경신 측 신하들의 선동으로 김경신이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곧 원성왕이다.
이 꿈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하는데 당시 김주원의 집이 북천의 북쪽에 있었다는 것은 사실일 수 있으나 김경신의 즉위가 어떤 신성한 힘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은 당시 원성왕계 왕실이 변칙적인 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꾸며낸 내용이다.
원성왕대는 대체적으로 평온한 시기였다. 그리고 그의 업적 중 특기할 것은 독서삼품과의 실시였다. 독서삼품과는 관직에 임명하거나 승진시킬 때 유교 경전을 얼마나 잘 읽고 배웠는가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눈 제도이다.
강릉 김 씨의 시조가 되다
한편 왕위계승전에서 패배한 김주원은 강원도 명주로 도망 가 살았다. 원성왕은 그를 명주군왕에 봉해주었다. 명주군 지역에서 왕 노릇하라는 일종의 배려로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지 않고 포용한 것이다. 그 뒤 명주도독은 대대로 그의 후손에게 세습되었는데 이들은 신라 말까지 반독립적인 지방호족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후삼국 시대 명주 지방의 대표적인 호족이었던 왕순식도 그의 후손이었다.
또한 김주원의 정치활동을 제한하던 조치도 아들대에 와서는 풀렸다. 김주원의 아들이었던 김헌창은 벼슬을 하여 무진주도독을 거쳐 시중까지 올랐다. 그러나 아버지의 한을 잊지 않고 있었던 그는 오천주도독에 임명되자 백제의 수도였던 웅천주를 근거지로 삼았고 백제의 부를 표방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국호를 장아녀, 연호를 경운 원년이라 하였다. 그러나 김헌창의 군대는 웅진에서 현재의 공산성을 거점으로 최후의 항전을 하였다. 열흘이나 공격을 막아냈지만 역부족이었고 성이 함락될 것을 짐작한 김헌창은 스스로 자살하였다. 이렇게 난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자 그의 아들 범문이 고달산의 산적과 결탁하여 다시 난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고구려의 부흥을 표방하고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에 도읍한다는 명분을 세웠다. 하지만 이 난도 역시 실패하였고 김헌창 계열은 멸족되다시피 하였다.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