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7- 혜공왕과 김양상
[연재]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7- 혜공왕과 김양상
  • 이범희 기자
  • 입력 2016-04-04 09:57
  • 승인 2016.04.04 09:57
  • 호수 1144
  • 5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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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은 쿠데타를 부른다

“등잔 밑이 어둡다 했던가. 진리는 의외로 가까운 데 있다.” “지식보다 중요한 건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은 우리의 주변에 우리 선조들의 삶과 역사 속에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것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 선조들에게 느끼고 배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요서울]은 저자 김갑동이 쓴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를 통해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을 다룸으로써 누가 옳은 길을 갔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또 인물들을 시대 순으로 배치해 자연스럽게 한국사의 전개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 일곱 번째로 ‘ 혜공왕과 김양상’편이다.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는 전성기를 누렸다. 문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신문왕은 탄탄한 왕실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신문왕 2년에는 국학을 설립하여 충과 효로 무장된 신하들을 양성하였다. 전국을 9주5소경으로 정비하고 9서당의 군대를 마련함으로써 정치·군사면의 제도적 정비로 꾀하였다.

또 녹읍을 혁파하여 귀족들의 권한을 약화시켰다. 귀족들이 녹읍의 백성을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킬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효소왕·성덕왕·효성황·경덕왕대에 안정된 정치체제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신라도 후기로 들어오면서는 서서히 쇠망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극심한 왕위쟁탈전이 개시된 것이다. 경덕왕 때 녹읍이 부활되면서 귀족 세력이 서로 각축을 벌이게 된 것이다. 그것은 혜공왕대에 시작된 귀족들의 싸움에서 비롯되었다. 혜공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으므로 그 어머니인 만월부인이 섭정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즉위 직후부터 괴이한 일들이 잇달아 일어났다.

어느 마을의 소가 다리가 다섯 달린 송아지를 낳았는가 하면, 강주(진주) 관청의 동쪽 당이 꺼져 연못이 되었는데 그 크기가 가로 7척, 세로 13척이나 되었다. 이 연못에 갑자기 잉어 5, 6마리가 생기더니 그 몸뚱이가 계속 커지고 그에 따라 연못도 커지는 것이었다.

또 유성이 왕궁 동쪽에 떨어졌는데 그 머리는 항아리만 하고 그 꼬리는 3척 가량이나 되었다. 그 유성은 활활 타는 불과 같고 하늘과 땅도 진동하였다. 호랑이가 궁궐 안으로 뛰어 들어오기도 하였다. 어린 왕은 두려움에 떨며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어찌 이러한 해괴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누가 그 이유를 짐에게 말해주시오.”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속으로는 그것이 왕태후가 정사를 좌우하였기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왕은 답답한 마음에 다시 울부짖듯이 말하였다.
“왜 아무 말들이 없으시오. 그러면 일관이 한번 말을 해보십시오. 그대는 음양오행과 하늘의 이치에 밝은 사람이니 지금 같은 일들이 왜 일어나는 것인지 알 것 아니오?”

일관은 마지못해 대답하였다. “가끔씩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전하께서는 너무 심려 마시옵소서. 다만 전하께서는 크게 사면령을 내리시어 천기를 바로잡아야  할 따름이옵니다.”
그날로 해공왕은 영을 내려 죄질이 무거운 사형수 이외에 가벼운 죄수들을 모두 풀어주는 대사면령을 반포하였다. 사면은 왕이 하늘에 잘못을 비는 하나의 방법이었으며 농경국가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노동력을 확보하려는 이주의 의미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변괴는 그치지 않았다. 황룡사 남쪽에서 지진이 일어나 땅이 흔들리는 소리가 천둥소리 같았으며 왕궁에 있는 샘이 말라 몰을 마실 수가 없었다. 이러한 자연재해는 왕이 천명에 따르지 않고 음양오행을 거슬렀을 때 일어나는 현상으로 여겼다. 이른바 하늘의 꾸짖음인 것이다.

특히 각간 대공의 집 배나무에는 참새가 무수히 몰려들었다. 대공은 당시 가장 강력한 세력가로 그의 휘하에는 많은 사병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들 참새가 출세를 노린 자들이라 생각하였다. 또 ‘안국병법’에는 이러한 변괴가 있으면 천하가 어지러워진다고도 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왕도인 경주 여기저기서 이상한 소문이 들리기도 하였다. 머지않아 대공이 반란을 일으키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왕은 알지 못하였다. 궁중에는 대공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왕에게 직언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니 다를까. 혜공왕 4년 7월, 대공은 대렴이란 자와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다. 그 휘하의 사병들을 모아 왕궁을 포위하고 왕을 위협하였다. 이 여파로 전국에 있는 96명의 귀족들이 패를 나누어 싸우는 난국이 벌어졌고 그러한 사태가 무려 33일이나 계속되었다.

왕과 태후는 당황했으나 전국에 총동원령을 내려 왕당군을 모집한 뒤에야 이를 진압할 수 있었다. 대공의 집에 있던 재산과 보물을 몰수하여 왕궁으로 들여오고 왕은 대공의 구족을 모두 죽여 씨를 없애라 명령하였다. 이러한 혼란을 미리 예견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표훈대사였다. 표훈은 혜공왕의 아버지인 경덕왕에게 총애를 받는 스님이었다. 경덕왕은 오래도록 아들이 없었다. 그리하여 왕비를 폐하고 만월부인을 후비로 맞이하였다.

반역을 잠재우고 왕위를 차지하다

대공의 난을 겪고 난 후 태후와 왕은 정국을 일신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국정의 책임자를 갈아치웠다. 신유를 상대등에 임명하였으며 김은거를 시중에 임명하였다.

시중은 국가의 총수기관인 집사부의 장관으로 국정의 총책임자였으며 상대등은 대등이란 관위에 있는 귀족들의 회의기관인 화백 회의의 의장이었다. 이들을 전격적으로 교체하여 국정을 쇄신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도 잠시 왕은 점차 여색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정사는 외면한 채 놀고 마시는 데 세월을 보냈다. 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반란도 끊이지 않았다. 혜공왕 6년에는 대아찬 김융이 반란을 일으켰다. 하위에 있던 관직자까지도 왕을 우습게 본 것이다. 왕은 이에 대한 책임을 시중에게 물어 김은거를 퇴출하고 정문을 새로이 시중에 임명하였다.

혜공왕 10년에는 김양상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이듬해에는 김순이 시중직에 올랐다. 그러자 김은거와 정문이 반발하였다. 이들은 둘 다 시중직에 있던 자들이었다. 자신의 무능은 깨닫지 못하고 신하들에게만 책임을 묻는 행태가 한심하였고 국정의 총책임자를 제 마음대로 갈아치우는 태도도 못마땅하였다. 그러나 이 반란은 김양상이 진압하였다.

김양상은 내물왕의 10대손이었다. 17대 내물왕은 아들 넷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는 3대 이상을 가지 못했다. 이후 즉위에 오른 선덕왕은 김경신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아찬 의공을 시중에 임명하는 인사조치를 취하였다. 자신을 도와주었던 김경신을 귀족회의 의장에 앉힘으로써 귀족들을 장악하는 반면 시중직에는 신라 17관등 중 제6관등에 불과하였던 의공을 임명하여 그 권한을 축소했다.

선덕왕의 치적으로는 패강진의 개척을 들 수 있다. 선덕왕 2년 패강 남쪽 주·현 백성들의 사정을 살펴 위로하고 한주에 순행해 민가를 패강진으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이듬해 1월에는 김체신을 대곡직 군주, 즉 패강진 장관에 임명함으로써 개척사업을 일단 완료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의지도 오래가지 못하였다. 즉위한 지 5년 만에 중병에 걸리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 집권한 지 6년 만에 이승을 떠났다. 선덕왕의 시신은 불교의 의례에 따라 화장하여 동해에 뿌려졌다.

혜공왕과 김양상은 본래 왕과 신하의 관계였으나 혜공왕이 그에 걸맞은 통치력과 지도력을 갖추지 못하였기에 신하들도 떠나고 잦은 반란에 시달린 것이다. 혜공왕이 즉위한 후 온갖 해괴한 일들이 일어나고 나라 안이 시끄러운 것도 이와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다. 정치가 올바르지 못할 때 곧 백성의 고통으로 이어지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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