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굴·신체·차량 번호판 등 개인정보 온라인서 노출
“유포되면 즉각 경찰에 신고…더 큰 확산 막아야”
국내 차량용 블랙박스 수가 700만대를 돌파했다. 시비를 가리기 어려운 각종 사고에 결정적 단서로 활약하면서 운전자들에게 높은 신뢰를 얻은 결과다. 이 같은 ‘해결사’ 블랙박스가 최근 급증한 수만큼이나 각종 문제도 야기하고 있다. 모자이크나 음성변조가 되지 않은 개인 신상이 유포되는 통에 상당수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있다. 더구나 차 안에서 몰래 성관계하는 장면을 촬영해 협박 도구로 삼는 등 심각한 범죄로 악용되기도 해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 직장인 A씨는 최근 자신의 차량이 찍힌 블랙박스 영상이 인터넷을 통해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해당 영상은 난폭운전을 벌이는 한 운전자의 모습이 찍힌 영상인데, A씨의 차량은 난폭운전과는 무관하게 이 도로를 지나가다가 영상에 담겼다. 포털사이트 등에는 이 운전자의 행태를 비판하는 글과 함께 이 영상이 버젓이 걸려 있었다. 물론 모자이크는 없었다. A씨는 직접적으로 물의를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차량 번호판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게 영 찝찝하다고 말한다.
# B씨는 요즘 택시를 타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사생활이 인터넷에 유포될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블랙박스의 성능이 강화되면서 화질 및 차량 내부를 찍을 수 있게 되면서 걱정은 더 커졌다. B씨는 최근 온라인에서 두 남녀의 스킨십이나 행인의 욕설, 우스꽝스러운 행동 등이 차량용 블랙박스에 촬영돼 온라인을 떠돌고 있다는 점 때문에 행동이 조심스러워 진다.
차량용 블랙박스의 존재감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각종 분쟁에 결정적 단서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최근 보험사에 등록된 블랙박스는 580만대. 등록되지 않은 블랙박스까지 합하면 700만대가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2000만대에 달하는 자동차 등록대수와 비교하면 3분의1 이상은 블랙박스를 달고 있는 셈이다.
이에 따라 지난해 보험사기 시도도 위축됐다. 전체 보험사기 중에서 자동차 보험사기가 차지하는 비율은 2005년 77.6%에서 10년 만에 30.6%P나 줄었다.
블랙박스 공급 증가의 순기능은 또 있다. 지난 2013년 전국 16만여 건이던 시민들의 영상 공익신고는 지난해 61만여 건으로 급증했다. 이 중 대부분이 블랙박스 신고다. 블랙박스는 교통 문화까지 바꿨다. 운전자들이 신호위반을 망설이게 되는가 하면, 무단횡단을 하려는 사람들도 이전보다 조심하게 됐다.
성관계 영상 유포 등 악용 늘어
문제는 급증하는 블랙박스의 수만큼 악용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전방만 촬영하던 초기 제품과 달리 요즘에는 후방 및 내부, 음성 등의 촬영이 가능하다. 품질 역시 고화질로 녹화가 돼 더욱 선명하게 사고현장을 볼 수 있다.
이런 영상들은 온라인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모자이크 처리가 되지 않은 채 돌아다니고 있어 물의를 빚고 있다. 자동차 번호판이나 얼굴, 신체부위 등이 화면에 그대로 등장해 네티즌들에 의해 신상정보가 공개되는 사례가 있다. 일부 운전자 사이에서는 시비가 제대로 가려지지 않는 상황에서 상대방을 비방하기 위해 고의로 상대방 얼굴을 공개, 네티즌들의 ‘마녀사냥’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지난 2010년 ‘택시 승객 진상녀’라는 제목의 동영상은 6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온라인에서 회자된다. 영상에는 한 여성이 택시 기사에게 막말을 하는 장면이 담겼다. 택시 내부를 비추는 블랙박스엔 승객의 목소리와 목적지, 옷차림까지 드러나 지인이라면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신상이 노출돼 사회에 파장을 일으켰다.
범죄로 악용되는 사례도 빈번해지고 있다. 지난해 11월 차량 안에서 성관계 동영상을 촬영하고 유포한 혐의로 남성 2명이 구속됐다. 이 중 한 명인 C씨는 차량에서 블랙박스로 각각 다른 여성과의 성관계 장면을 몰래 촬영하고 4분짜리 동영상 2개를 지인에게 전달한 혐의를 받았다.
또 결별을 요구하는 내연녀를 폭행·감금하고 성관계 장면을 촬영해 유포한 남성에게 징역형이 선고되기도 했다. D씨는 2014년 군산 나운동 한 주차장에 세워둔 자신의 승용차에서 차량 블랙박스로 E씨와의 성관계 장면을 몰래 촬영한 뒤 지인에게 성관계 사진을 휴대폰 문자메시지로 보낸 혐의를 받았다. D씨는 법원으로부터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사생활 유포될까 전전긍긍
이에 따라 블랙박스를 바라보는 시선이 양극화되고 있다. 내 차에는 어쩔 수 없이 블랙박스를 설치하면서도, 사생활을 감시당하고 범죄에 연루될지 모르는 막연한 불안감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조사전문기업 트렌드모니터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체 운전자의 91.5%가 차량용 블랙박스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것으로 조사됐다(지난해 기준). 대부분 운전자들이 블랙박스를 당연히 설치해야만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블랙박스에 대한 시선이 마냥 좋지만은 않다. 전체 10명 중 6명이 블랙박스가 악용될 소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또 블랙박스의 보급이 늘어날수록 개인의 사생활이 침해될 수 있다는 의견에 64.3%가 공감했으며, 81.8%의 운전자들은 블랙박스 동영상을 무분별하게 유포하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까지 블랙박스 동영상 유포를 막기 위한 뚜렷한 예방책은 없는 실정이다. 물론 현행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원래 목적 외에 블랙박스 동영상을 유출할 경우 처벌을 받긴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온라인에 한번 유출되면 최초 유포자는 처벌할 수 있지만, 나머지 유포자를 모두 처벌할 수 없다는 점도 한계다. 또 이미 퍼진 동영상은 지우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일단 개인 사생활이 노출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게 전문가의 설명이다.
경찰 관계자는 “블랙박스 동영상이 유포됐을 경우, 즉각 경찰에 신고하고 해당 인터넷 사이트에 ‘권리 침해 신고’ 등을 통해 더 확산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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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호 기자 shh@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