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상 운영 불가능한 약사 명의 빌려 대면약국 운영
의약분업 예외지역만 노려…“관리 소홀 노린 범죄”
죽은 사람이 약국을 운영하다가 경찰에 적발됐다. 다소 섬뜩하고 황당하게 들리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약국가의 고질적 병폐로 꼽히는 이른바 ‘면대(면허대여)약국’ 얘기다.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하기에는 상황이 적잖이 심각하다. 약사법을 어긴 건 둘째 치고, 약사면허 없이 조제가 이뤄지는 탓에 약물 오·남용 사례도 빈번하다. 최근 정상적으로 약국 운영이 불가능한 약사들의 명의를 빌려 면대약국을 운영하면서 30억 원대의 부당 이득을 올린 일당이 무더기로 적발됐다. 또 법정조제일수를 지키지 않고 의약품을 판매한 약사들도 덜미가 잡혔다. 약업계의 질서를 해치는 면대약국 실태를 알아봤다.
약국을 운영하는 윤 모(77)씨는 지난해 5월 사고로 사망했다. 그러나 올해 2월까지 해당 약국의 명의는 여전히 윤 씨였다. 사망한 후 약 9개월 간 약국 운영을 계속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사연은 이렇다. 김 모(61)씨는 지난해 1월 경기 평택에서 약사인 윤 씨의 명의를 빌려 약국을 개설해 운영하다 같은 해 5월 윤 씨가 사고로 사망했음에도 망자의 명의로 운영을 계속해 왔다.
서류상으로만 보면 죽은 사람이 죽지도 않고(?) 약국을 계속 운영한 셈이다. 경기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지난 23일 타인의 명의로 약국을 개설한 혐의(약사법 위반)로 이 모(62)씨 등 5명을 구속하고 망자 명의를 계속 운영한 김 씨 등 4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이들에게 명의를 빌려준 약사 한 모(75)씨 등 15명과 종업원 이 모(50)씨 등 3명도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이 씨 등은 2012년 3월부터 올 2월까지 화성, 평택 등 의약분업 예외지역에서 약사의 명의를 빌려 약국을 운영하고 4년간 29억 원 상당의 매출을 올린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은 약국 반경 1㎞ 이내에 병원이 없어 의사의 처방전 없이 의약품을 조제·판매할 수 있는 의약분업 예외지역만을 노려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에게 명의를 넘긴 약사들은 시각·청각 장애, 정신질환, 신용불량 등을 겪으며 정상적으로 약국 운영이 어려운 상태였으며, 이 씨 등은 이들에게 거주할 집을 마련해주거나 월 400만~500만 원을 건네며 명의를 빌린 것으로 조사 결과 드러났다.
면대약국 수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경찰은 또 의약분업 예외지역에서 무차별적으로 전문의약품을 약을 져 판매한 혐의(약사법 위반)로 박 모(60)씨 등 19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이들은 경기 화성, 평택, 용인, 안성 등 시골 지역에서 법정조제일수로 정해진 5일을 초과해 7~20일까지 전문의약품을 조제·판매한 혐의를 받고 있다.
특히 부작용이 심한 스테로이드제 등이 첨가된 전문의약품은 오남용 우려 등으로 입·출고 내용을 기록하는 등 관리해야 하지만 현금으로만 판매하거나 심지어 택배를 이용해 무분별하게 처방하기도 했다.
고령, 장애 겪는 약사에 “월급 주겠다” 유혹
입건된 이들 중 한명인 고용주 A씨는 지난 2013년 5월부터 면대약국을 운영했다. 약사공론에 따르면 A씨가 면대약국을 운영하게 된 계기는 자녀들의 학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약국 영업사원과 도매상 등에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약국을 운영하고자 마음먹었다. A씨는 약사와 함께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약국에서 근무를 했다고 말했다.
A씨는 직접 조제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약사가 관절약, 감기약, 위장약 등 증세별로 약을 미리 만들어 놓으면, A씨가 해당 약을 환자들에게 준 것으로 전해졌다. A씨가 고용한 약사는 74~75세의 고령 약사로 통상 400~500만 원 정도를 지급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사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면대약국 운영은 거액의 매출을 올릴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0월에는 인천에서 대학병원 인근 등에서 약국을 운영해 수십억 원대의 매출을 챙긴 한 업주가 검찰에 적발되기도 했다.
당시 인천지검은 고용한 약사의 면허로 약국을 개업한 혐의(약사법 위반)로 김모(53)씨를 구속기소하고, 면허를 빌려준 약사 2명에 대해 같은 혐의로 불구속기소했다. 김씨는 지난 2003년부터 최근까지 인천 남동구 구월동의 한 대학병원 근처에서 자신이 고용한 약사 2명의 면허로 약국 2곳을 운영한 혐의를 받았다.
김씨 역시 자본이 부족해 약국을 개설하지 못하는 약사들을 대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 면허를 빌려준 약사는 김씨로부터 월급을 받고 처방약 조제 등의 업무만 맡았다. 김씨는 ‘노른자’ 상권으로 분류되는 대학병원 바로 앞에서 약국을 운영하며 매년 수십억 원대 매출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당국 관리 소홀한 점 노려
약사 면허대여는 거대 약국 난립과 처방약 외 약품의 과다 조제 등 제약업계의 질서를 해치기 때문에 엄격히 금지되고 있다. 이 사건은 약업계에 팽배한 면대 약국의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는 지적이다.
특히 규정은 있지만 약사에 대한 면허신고제가 시행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약사 면허에 대한 지속적 관리가 어렵다는 게 원인으로 꼽힌다. 고령이나 신체적·정신적 질환 등으로 약국 운영이 어려운 약사들은 유혹에 넘어갈 확률이 높다.
따라서 보다 근본적인 면허관리 체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상황이다. 약사 면허에 대한 검증이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특히 처방전 없이 조제되는 전문의약품 유통의 부작용 우려도 높다.
경찰 관계자는 “주변에 병원이 없는 의약분업 예외지역에서 의사의 처방전이 없어도 전문의약품 등의 조제, 판매가 가능하고 상대적으로 당국의 관리가 소홀한 점을 노렸다”면서 “스테로이드제 등 전문의약품을 무분별하게 처방할 경우 부작용이 발생할 우려가 크기 때문에 반드시 의사의 처방을 받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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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호 기자 shh@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