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박시은 기자] 주식시장의 ‘큰 손’이라 불리는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이 지난 18일 열린 주주총회(이하 주총)의 관전 포인트로 주목받았다. 국민연금이 8% 가량의 지분을 보유한 SK그룹의 최태원 회장이 등기이사로 복귀하는 것에 반대 의사를 밝히면서부터다. 그동안 국민연금은 적극적인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그런데 문형표 국민연금 이사장과 강면욱 기금운용본부장 체제 후 기업의 경영활동에 대한 국민연금의 개입이 강화된 것이다. 이에 SK는 물론 한진, 효성, 현대 등 300여개 회사들의 주주총회를 향한 이목도 집중됐다.

강화된 국민연금, 결과 아쉽지만…
국민연금은 지난해 10월 말 기금자산(시가기준)은 507조 원이다. 이 중 국내주식에 96조8207억 원(19.1%), 해외주식에 68조1162억 원(13.5%)을 투자해 국내외 주식시장의 큰손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주식을 보유한 기업들의 주총이 열릴 때마다 기금운영본부 산하 투자위원회를 통해 주총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 판단한다. 여러 사안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나, 주주가치를 중심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그동안은 거수기 역할에 그쳤다는 지적을 받았다. 국민연금의 주총 반대의견 제시는 10건 중 1건 꼴이고, 반대의견으로 안건이 부결된 사례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1월부터 10월까지 국민연금이 주식보유 기업들의 주총에 참석해 의결권을 행사한 안건은 2768건에 이른다. 이 중 10.2%인 282건에 반대표를 던졌고, 89.6%인 2479건은 찬성표를, 0.2%인 7건은 중립·기권표를 행사했다.
이처럼 거수기란 쓴소리를 듣던 국민연금이 올해 열린 주총에서는 변화의 신호를 보였다. 일명 슈퍼 주총데이로 불린 지난 18일 열린 SK와 한진, 효성, 현대, CJ, LG 등 333개 기업들의 일부 주총 안건에 국민연금이 제동을 건 것이다.
주총이 열리기 전까지 공식적인 발표는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지만, 일부 그룹 총수들의 등기이사 선임과 재선임 관련 안건에 대한 반대의 기류가 포착됐다.
특히 최태원 SK 그룹 회장의 SK㈜ 등기이사 복귀 문제가 주목을 받았다. 최 회장이 배임으로 형사처벌을 받았던 것을 이유로 등기이사 자격 미달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국내주식 의결권 행사 세부기준 27조에 따르면 ▲법령상 이사로서 결격사유가 있는 자 ▲과도한 겸임으로 충실한 의무 수행이 어려운 자 ▲기업가치 훼손 내지 주주 권익의 침해 이력이 있는 자일 때 사내이사 후보안건에 반대할 수 있다.
최태원 회장은 2014년 대법원에서 실형이 확정되면서 모든 계열사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났다. 지난해 사면을 받고 나왔으나 최 회장이 직접 밝힌 ‘혼외자 스캔들’로 기업가치 훼손 등의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또 국민연금은 효성그룹의 조석래 회장과 조현준 사장의 등기이사 재선임에 대해 기업가치 훼손과 주주 권익 침해를 이유로 반대의 뜻을 보였다. 조석래 회장과 조현준 사장 등이 조세포탈 등의 혐의로 실형과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점 때문이다.
조종사 노동조합과 갈등을 겪고 있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재선임에 대해서도 과도한 연임을 이유로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전 고지·후보제안은?
이 같은 국민연금의 행보는 과거에 비해 적극적인 의결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문형표 국민연금 이사장과 강면욱 기금운용본부장 체제 이후 기업들에게 배당 확대를 요구하고, 기업의 경영활동에 개입하는 강도가 강해졌다는 것이다.
배당의 경우 지난해 12월 내부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지난 2월부터 배당성향이 낮은 기업 중 일정규모 이상 기업과 ‘기업과의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배당이 적절하지 않은 경우 주주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일각에서는 “문형표 이사장은 국민이 맡긴 돈을 다시 돌려줘야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물”이라며 “수익을 위해 기업의 경영에 어느 정도 관여하는 흐름으로 가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주총 결과는 아쉬움을 낳았다. 국민연금이 반대한 것으로 알려진 일부 주총 안건이 무사 통과됐기 때문이다.
먼저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주총을 통해 약 2년 만에 SK㈜의 사내이사로 복귀했다. 조석래 효성 회장의 등기이사 재선임 안건도 통과됐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역시 대한항공 등기이사 재선임 안건을 통과시켰다.
이는 대주주 지분율이 높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국민연금과 대주주와의 지분 차이가 크다는 것이다.
실제로 국민연금의 SK㈜ 보유 지분은 8.57%로 2대 주주에 올라있다. 하지만, 최태원 회장의 보유 지분 23.4%와 여동생 최기원 SK행복나눔재단 이사장 지분 7.46%, 임직원 지분을 합친 것에 맞서기 어렵다.
효성 보유 지분은 8.25%로 조석래 회장과 조현준 사장, 삼남 조현상 부사장 등 일가가 보유한 35.06%에 미치지 못한다. 국민연금이 보유하고 있는 대한항공 지분도 4%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해당 기업들의 주요주주로 올라서 있고, 기업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시각이 많다. 때문에 국민연금의 태도 변화를 놓고 “반대의사 표명을 통해 주주와 기업 간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를 취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따라서 국민연금이 주주권을 제대로 행사하기 위해서는 안건 통과 여부에 상관없이 결격사유가 있는 인물과 그 이유를 사전에 밝혀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또는 직접 이사후보를 제안하는 등의 적극적인 방법도 고려대상으로 얘기된다.
이와 관련해 국민연금 관계자는 “국민연금은 규정을 기준으로 의결권을 행사하고 있다”며 “최근 민간기관에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평가도 받고 있으며, 상대적인 얘기지만 지금처럼 의결권 행사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박시은 기자 seun897@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