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잔 밑이 어둡다 했던가. 진리는 의외로 가까운 데 있다.” “지식보다 중요한 건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은 우리의 주변에 우리 선조들의 삶과 역사 속에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것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 선조들에게 느끼고 배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요서울]은 저자 김갑동이 쓴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를 통해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을 다룸으로써 누가 옳은 길을 갔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또 인물들을 시대 순으로 배치해 자연스럽게 한국사의 전개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 네번째로 ‘계백과 김유신’편이다.
의자왕은 2년,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친위정변을 단행했다. 조카 교기 및 이모 네 명,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던 내좌평 기미 등 40여 명을 정계에서 쫓아낸 것이다. 또 부여 융을 태자로 책봉하여 후계자를 둘러싼 암투를 조기에 종식시켰다. 이렇게 왕권을 강화한 의자왕은 독자적인 외교정책과 정복활동을 펼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고구려와 손을 잡고 신라를 협공하였다. 643년에는 신라의 당항성을 공격하였고 655년에는 한강 하류 지역 30여 성을 되찾았다. 즉 신라와 당의 교통로를 차단하여 신라를 고립시킨 것이다. 그 결과 고구려와 대립하던 당은 백제 대신 신라와 손을 잡았고 이를 견제하기 위해 의자왕은 왜국과의 관계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말기에 접어들면서 의자왕은 환락에 빠지기 시작하였고 의자왕의 부인 은고가 정치를 좌우하였다. 의자왕 17년에는 왕의 서자 41명을 한꺼번에 좌평으로 임명하기까지 했다. 왕의 인척들이 정사에 깊이 간여하자 정계는 어지럽고 나라는 위태로워졌다.
이를 보다 못한 좌평 성충이 애써 왕에게 충간했으나 오히려 옥에 갇히고 말았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자 성충은 다시 왕에게 글을 올렸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법입니다. 원컨대 한 마디 말만 여쭙고 죽겠습니다. 신이 시국의 변화를 살펴보니 머지않아 병란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병사를 쓰는 것은 그 지세를 잘 가려야 하는것이니 백강 상류에 진을 치고 적을 맞아 싸우면 반드시 나라를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다른 나라 군대가 쳐들어오면 땅으로는 탄현을 넘지 않게 하시고 바다로는 기벌포에 적군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러나 의자왕은 성충의 마지막 간언을 듣고도 코웃음만 칠 뿐, 귀담아 듣지 않았다. 660년에 들어오면서 백제에는 여러 가지 변괴가 일어났다. 사비 도성의 우물물과 백강물이 핏빛으로 변하고 큰 개가 백강 언덕에서 사비 도성을 향해 울부짖다가 가버리곤 했다.
또 귀신 하나가 궁중으로 들어와 큰 소리로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고 하고는 땅속으로 들어가버렸다. 왕이 이상히 여겨 땅을 파보았는데 거기서 거북이 한 마리가 나왔다. 그런데 그 등에는 ‘백제는 둥근 달 같고 신라는 새 달과 같네’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왕은 무당을 불러 이 그의 뜻을 물었다. 무당은 사실대로 고했다. “차면 기우는 것이요, 새달은 앞으로 차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백제가 망할 징조입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무당을 죽여버리고는 다른 무당을 불러 다시 물었다. 죽음을 두려워한 그는 거짓으로 고했다. “둥근 달은 성한 것이옵고 새 달은 미약한 것입니다. 그러니 백제는 점점 흥성하고 신라는 미약해진다는 뜻입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안심했다. 그러다가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들리자 의자왕은 허겁지겁 어전회의를 소집하여 어떻게 대처할지를 의논하였다. 우선 좌평 의직이 나와 말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 바다를 건너왔고 또 수전에 약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신라는 당이 원조해주는 것을 믿고 적을 가벼이 여기니, 만일 당나라 군사가 싸움에서 불리해지면 겁을 집어먹고 진격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당나라 군사와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달송 상영이 반대하고 나섰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 왔기 때문에 빨리 승패를 결정지으려 할 것이므로 그 기세를 꺾기 어렵습니다.
한편 신라 군사는 우리에게 여러 번 패하였기 때문에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군의 진격로를 막고 신라와 먼저 대결해야 합니다.” 이 쪽도 저 쪽도 다 일리가 있는 듯 하여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의자왕은 성충과 마찬가지로 충간을 하다가 귀양가 있던 좌평 홍수에게 물었다.
“좌평 성충의 말대로 해야 합니다.” 그것이 흥수의 대답이었으나, 이번에는 대신들이 모두 함께 반대하였다. “흥수의 의견대로 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당나라 군사들을 백강에 들어오게 하되 배를 나란히 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또 신라군을 탄현을 넘어 소로로 오게 하되 군사를 정렬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렇게 만든 뒤에 공격한다며 마치 닭장에 든 닭과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줍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황산벌에서 맞닥뜨리다
마침내 왕은 신하들의 말대로 하려 했다. 그러나 당군은 이미 기벌포를 지나 백강으로 들어와 있었고 신라군도 탄현을 넘어 소로를 지난 뒤였다. 조정에서 갑론을박하며 시건을 허비한 탓이었다. 할 수 없이 의자왕은 계백을 보내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맞아 싸우게 하였다.
신라군에는 대장군 김유신과 장군 품일·흠춘 등이 지휘하였으니 이로써 계백의 5000 결사대와 김유신의 5만 군대가 대결하게 되었다. 5000이 5만을 상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그러나 네 번이나 싸워 이기고, 그만큼이나 버틴 것도 계백의 훌륭한 지도력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 덕분이었다. 반대로 김유신은 5만 병력으로 연달아 패하고 비상수단을 동원해서야 간신히 이길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각 나라에서 제일가는 군인이었다.
나라를 위해, 그리고 스스로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여기에서 누가 뛰어나고 누가 못한지를 가려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계백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달아나지 않고 맞섰으며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아끼지 않고 생명을 던져 싸웠다. 그렇기에 비록 패장이 되었지만 그의 용기와 살신보국정신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것이다.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