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재인, 김종인 통해 친노 쳐내는 ‘차도살인’
추가 현역 컷 오프가 불편한 동거의 갈림길
[일요서울 | 류제성 언론인]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의 서슬이 시퍼렇다. 처음 문재인 전 대표가 물러나면서 선대위원장으로 앉혔을 때는 ‘위탁경영인’ 정도로 인식됐다. 실질적인 오너인 문 전 대표가 막후에서 수렴청정을 할 걸로 예상됐다. 하지만 비대위의 대표 직함을 갖고부터는 무소불위의 칼날을 휘두르고 있다.
김 대표가 당헌·당규를 마음대로 바꿔 공천권을 포함한 비상대권을 장악할 수 있도록 만든 ‘2·29 당무위원회 거사’는 압권이었다. 이날 당무위에선 컷오프 인사의 구제, 비례대표 후보 선출 방식 결정 등의 당규 수정 권한을 김종인 체제의 비대위에 일임했다. 이로써 문재인 대표 체제에서 마련된 ‘김상곤 혁신안’의 핵심인 시스템공천은 사실상 무력화 됐다.
앞서 김종인 체제의 공천관리위(위원장 홍창선)는 현역 의원 가운데 3선 이상 중진 50%, 초·재선 30%를 대상으로 정밀검증을 거쳐 공천에서 원천 배제하기로 했다. 모두 33명이 검토 대상이다. 문재인 체제에서 마련한 현역 의원 하위 20% 컷오프에 더해 대대적인 물갈이의 신호탄을 쐈다.
시스템 공천 등 무력화
김종인의 독주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국회 문제에서도 자기 뜻을 관철시키기 시작했다.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해 당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벌이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끝내도록 극약처방을 내렸다. 김 대표는 필리버스터를 주도한 이종걸 원내대표에게 “그러다 선거에 지면 당신이 책임지겠느냐”고 일갈해 기를 꺾어버렸다.
한 발 더 나아가 야권통합 메시지도 던졌다. 더민주의 국회 필리버스터가 종료된 2일 김 대표는 “국민의 여망에 부응하기 위해, 야권이 총선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라도 단합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며 “야권이 다시 한 번 통합에 동참하자는 제의를 드린다”고 했다. 또 “더민주를 탈당한 분 대다수가 당시 지도부 문제를 걸고 탈당했기 때문에 그 명분은 다 사라지지 않았나 생각한다”고도 했다. 탈당파의 이탈 명분이던 ‘친노 패권주의’가 옅어졌고 문 전 대표도 퇴진했으니 다시 돌아오라는 메시지였다.
이 같은 김 대표의 ‘마이웨이’ 행보는 문 전 대표의 지금까지 구상과 완전 딴판이다. 먼저 문 전 대표가 야심차게 마련한 ‘김상곤 혁신안’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렸다. 필리버스터도 문 전 대표는 SNS를 통해 연일 격려했던 투쟁방식이었다.
특히 야권통합을 제안하면서 ‘친노 패권주의’가 정리됐다고 주장한 건 노무현 정신을 유산으로 정치를 하는 문 전 대표의 존재감을 부정하는 말이다. 문 전 대표 입장에선 당을 이끌면서 만들어놓은 제도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치마저 김 대표가 깡그리 부정해 버렸다는 인식을 가질 법하다.
그러나 경남 양산 자택에 머물고 있는 문 전 대표는 김 대표의 독주를 수수방관하고 있다. 심지어 김 대표가 ‘광주선언’을 하는 날인 2월 25일 광주 친노계인 강기정 의원을 공천에서 원천배제토록 지시했지만 문 전 대표는 별다른 반발을 하지 않았다. 강 의원은 문 대표 밑에서 정책위의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김 대표는 국회에서 필리버스터를 진행 중이던 강 의원에게 SNS를 통해 “강기정 멋있다. 힘내라 !!”며 단지 격려를 보냈을 뿐이다.
강 의원은 의원총회에서 눈물을 흘리며 ‘백의종군’을 선언한 뒤 “당 비대위도 불출마를 선언하고 국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해야 한다”고 일갈했다. 범친노계인 정세균 의원이 반발하고, 광주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잇따랐지만 문 전 대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두고 야권 안팎에선 ‘문재인-김종인 밀약설’이 나돈다. 문 전 대표가 김 대표를 영입할 때 당을 완전히 바꾸도록 전권을 주고 자신은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대신, 김 대표가 문재인 대권가도의 킹메이커 역할을 해주겠다는 다짐을 받았다는 관측이다.
이 과정에서 나오는 말이 ‘차도살인(借刀殺人)론’이다. 남의 칼을 빌려서 사람을 죽인다는 뜻인데, 문 전 대표가 친노계 중에서 자신의 대권가도에 걸림돌이 될 만한 인물들을 김 전 대표가 대신 제거하도록 역할을 맡겼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친노계 내부에선 ‘문재인 불가론’이 없지 않다. 2012년 대선 때 한 차례 실패를 했기 때문에 2017년 대선에선 안희정 충남지사 같은 친노계의 다른 인물을 내세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문 전 대표가 이들을 무력화 시키고 친노 중에서도 ‘친문(親文)’만을 남겨두기 위해 김 전 대표의 칼을 빌리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개인적인 신뢰도 있다고 한다. 문 전 대표가 3년 전 대선 도전에 실패한 뒤, 그 시점에 박근혜 대통령과 멀어진 김 대표와 자주 어울렸던 것으로 알려진다. 부부동반으로 식사를 하기도 했다. 김 대표가 문 전 대표의 영입 제안에 망설이고 있을 때 부인인 김미경 전 이화여대 교수가 “그토록 부탁하는 데 들어주는 게 좋겠다”고 조언해 성사를 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를 엄밀하게 보면 동상이몽(同床異夢)을 하고 있다는 분석도 없지 않다. 무엇보다 둘 사이에 동질성을 찾기 어렵기 때문에 결코 대권가도를 함께 걷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1980년 전두환 국보위에 참여했고 박근혜 캠프에서도 활동했던 김 대표와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려는 문 전 대표는 태생부터 다르다.
두 사람이 손을 잡은 이후에도 이념 문제를 놓고 여러 번 부딪쳤다.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발사 사태 때 김 대표는 ‘북한 자멸론’ ‘궤멸론’을 얘기했다.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보완해야 한다고도 했다. 정부의 개성공단 가동중단 조치가 나오자 “대북 현안에 대해 박 대통령에게 설명할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문 전 대표는 “개성공단 폐쇄 조치에 단순한 반대가 아니라 화가 난다. 참으로 어리석고 한심한 조치다. 전쟁이라도 하자는 말이냐”고 초강경 입장을 보였다.
先 총선승리, 後 대권가도
한일 간 위안부 협상 타결에 대해 문 전 대표는 “피해 할머니들의 슬픔을 더 깊게 만들었다”고 비난했지만, 김 대표는 피해자 할머니들 면전에서 “국가끼리 합의한 것이니 되돌릴 수는 없다”고 말했다.
‘선(先) 총선승리, 후(後) 문재인 대권가도’를 고리로 하는 문재인-김종인의 연대는 동상이몽일 수 있다. 그리고 이 동상이몽은 3월이 위기다. 공천작업이 본격화 된 시점에 김 대표가 무차별적으로 휘두르기 시작한 칼날이 문 전 대표 주변도 겨눌 수 있는 까닭이다. 추가 컷오프에서 ‘친문’ 일부가 포함되면 ‘문재인 책임론’이 불거질 수밖에 없고, 이 경우 문 전 대표도 결별을 고민해야 한다.
만일 친노 전체가 ‘반기’(反旗)를 들게 되면 문 전 대표는 고립된다. 총선 이후 당의 중심으로 다시 들어가는 통로조차 봉쇄될 수 있다. 친노 세력이 오히려 다른 대안을 찾는 상황이 오면 대권꿈도 멀어지기 때문에 김 대표를 겨냥해 뭔가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다. 이미 정세균계가 강기정 의원의 공천배제에 대해 연판장을 돌리는 등 ‘범친노의 반란’을 예고한 바 있다.
하지만 김 대표는 ‘탈당’ 배수진을 치며 독주를 멈출 생각을 않고 있다. 그는 비상대권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내가 당에 커다란 애착이 있는 게 아니라 책임감 때문에 하는 거다”, “당을 한번 바꿔 보겠다는데 소속된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헤어질 수밖에 더 있느냐”고 했다. 자신은 언제든 당을 떠날 수 있으니 알아서 하라는 투다. 문 전 대표나 친노계는 이런 태도에 부글부글 끓고 있지만 아직은 내색하지 않는다. 이 시점에서 김종인 체제가 무너지면 선거전략이 완전히 꼬여버리는 까닭이다.
그러나 문 전 대표와 친노계의 인내심이 임계점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은 결정적인 뇌관이 있다. 바로 김종인 체제가 노골화 시킨 현역 의원 추가 컷오프다. 문재인 체제 때 컷오프 시킨 10명(현역 의원 20% 중 탈당자 제외)에 이어 최대 33명의 현역 의원을 추가로 탈락시키는데 이 과정에서 친노계가 얼마나 포함될 지가 관건이다.
만일 김 대표가 지금처럼 친노계의 눈치를 보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현역 의원을 솎아낸다면 문 대표도 ‘친정’ 보호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방법은 당내에 남아 있는 친노계를 총동원해 김종인 체제를 무력화 시키는 길이 유일하다. 이 경우 총선에는 차질을 빚겠지만 문 대표 자신이나 친노계의 몰락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할 고육책이다.
ilyo@ilyoseoul.co.kr
류제성 언론인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