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피플]은수미, '강철나비'에서 필리버스터 '스타'로
[핫피플]은수미, '강철나비'에서 필리버스터 '스타'로
  • 홍준철 기자
  • 입력 2016-02-29 09:44
  • 승인 2016.02.29 09:44
  • 호수 1139
  • 1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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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시간 정도 할테니,  동료 의원들 5시간만 버텨달라”
- 6년간 복역 안기부 고문 ‘소장·대장 50cm’ 잘라내

<정대웅 기자> photo@ilyoseoul.co.kr

“우리는 아무리 강해도 약합니다. 두렵지 않기 때문에…나서지 않는 게 아닙니다. 두렵지만 나서야 하기 때문에 나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용기입니다.”(2월24일 은수미 의원 마무리 발언中)

[일요서울ㅣ홍준철 기자] 더불어 민주당 은수미 의원이 10시간 18분간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방해)를 정리하며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연설 중 한 대목을 인용한 마무리 발언이다. 은 의원은 대테러방지법 직권상정을 막기 위해 강단에 올라가 “테러행위를 방지하는 것은 항상 인권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에 깊이 있는 검토가 필요하다”고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은 의원의 필리버스터는 역대 국회의원 중 최장 시간 기록을 갱신했으며 ‘필리버스터 스타’로도 등극했다.(종전 1969년 8월29일 신민당 박한상 의원 10시간 15분)

다음날인 25일, 은 의원은 페이스북에 8개의 통장을 나열한 사진을 게재하며 “1만 원, 2만 원씩 보내주신 후원금으로 한 개의 은행에서 정리된 통장만 8개.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라고 게재했다. 은 의원실에서는 후원금이 2500건이 넘어 다른 은행에 있는 통장도 확인해야 하는데 너무 많아서 집계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은 의원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대체 은수미 의원은 누구인가라는 궁금증이 일었다.

해병대 장교 군인집안 둘째딸

1963년생인 은 의원은 해병대 장교인 부친과 전업주부인 모친 사이 삼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군인집안으로 유복한 환경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창시절에는 당시 보기힘든 피아노를 쳤고 클래식을 듣고 공연을 보는 감수성이 풍부한 소녀였다. 평탄할 것만 같았던 그가 인생의 전환기를 맞은 것은 80년대 대학생이 되면서부터다. 그는 1983년 서울대 사회학과에 재학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학교에서 제적됐다.

“사실 은 의원의 몸은 정상 상태는 아닙니다. 은 의원은 1983년 서울대 사회학과 재학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학교에서 제적됐습니다. 이후 구로공단에서 봉제공장을 다니면서 백태웅ㆍ조국 교수 등과 노동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결성에 참여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992년부터 6년 동안 복역했습니다. 당시 국정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 분실에서 고문을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감옥에서 소장과 대장 50㎝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또 결핵이 후두로 번져 한동안 말을 못했습니다.”(은수미 류대영 보좌관)

사노맹 사건이란 1990년대초 혁명적 좌파조직인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조직원들을 국가안전기획부가 일제히 구속 및 수배했던 사건을 말한다. 사노맹은 노태우 군사독재정권의 타도와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 사회주의적 제도로의 사회변혁, 진보적인 노동자정당의 건설 등을 목표로 활동한 자생적 비합법사회주의전위조직이다.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장 출신의 백태웅과 노동자 시인 박노해 등이 중심이 되어 1989년 11월 12일 결성하였다.

그런데 국가안전기획부는 사노맹을 “사회주의 폭력혁명을 목표로 한 맑스-레닌주의 조직”으로 규정하고, 1991년 3월10일 박노해를 구속하였다. 또 1992년 4월 29일 백태웅을 비롯한 중앙위원과 주요 간부 전부를 구속했다. 그리고 이들을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의 구성 및 그 수괴 임무 종사의 혐의로 기소하였다.

국가안전기획부는 당시 사노맹이 전국 50여개의 노조와 40여개의 대학에 1230여명의 조직원을 거느렸다고 발표했다. 대대적인 구속 사건 이후 사노맹은 공개적인 진보정당 운동을 진행하였으나 국가안전기획부는 이에 대해서도 재건 혐의를 씌워 조직원에 대한 검거를 계속하여 사노맹 사건으로 기소된 인원은 총 300여명으로 해방 이후 최대의 조직사건으로 평가된다. 결국 1999년 3월 1일자로 잔형면제의 특별사면 및 복권 조치를 받았다.

함께 노동운동을 하던 조국 서울대 교수는 은 의원을 ‘강철나비’로 불렀다. 조 교수는 그 이유로 “은 의원이 고문을 받고 감옥에 있을 때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있는 ‘나의 어머니'라는 시를 자주 읽었다고 했습니다. 그 시에 등장하는 나비 얘기를 종종 했는데 평소 겉으로는 한없이 여려 보이고 눈물 많은 은 의원이지만 누구보다 심지가 굵고 강단 있기 때문에 ‘강철 나비'라는 별명을 만들어줬죠”라고 밝히고 있다.

은수미 또 다른 도전 ‘20대 총선은…’

1997년 출소한 은 의원은 김대중 정부시절인 1999년 3월1일자로 특별사면 및 복권을 받게 된다. 그가 김 전 대통령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는 배경이다. 그는 다시 공부를 시작해 2005년 서울대에서 노동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아 ‘노동전문가’로 명성을 날리게 됐다. 은 의원은 이후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사회운동론' 등을 강의했다. 한국노동연구원에서 노동문제를 연구했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노동정책 자문위원을 지내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됐다. 은 의원은 20대 총선을 맞이해 경기 성남시 중원구 출마를 선언, 또 다른 쉽지 않은 도전에 나서고 있다. 

mariocap@ilyoseoul.co.kr

홍준철 기자 mariocap@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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