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어떤 과정을 통해 한국에 정착될 수 있었을까? 자본주의가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있게끔 활발하게 자본주의적 경제 활동을 벌인 인물로는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초기 한국 자본주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묻고 넘어가야 할 질문들이다. 그러나 초기 한국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여전히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을 둘러싼 논란만 부각될 뿐, 정작 탐구해야 할 위의 문제들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뤄지는 듯하다.
그동안 ‘한국근대자본가연구(2002)’ 등의 저작을 통해 한국 자본주의 연구에 천착해온 저자 오미일은 근대의 다양한 자본가 군상을 그들의 사회적 신분이나 배경, 자본 축적 토대와 경로 등 몇 가지 기준에 의해 분류하여 각 유형의 대표적인 자본가들을 분석하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2014년 3월 출간했던 ‘근대 한국의 자본가들―민영휘에서 안희제까지, 부산에서 평양까지’는 그 결과물이다. [일요서울]은 이 책을 통해 자본주의의 정착과정을 재구성해본다. 그 다섯 번째는 ‘금은세공업자에서 화신백화점 창업주로 성공한 신태화家’다.
미쓰코시, 조지아, 미나카이 등 일본계 백화점의 성세를 보면서 백화점사업에 진출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던 박흥식은 새로 창업하기보다 기존 업체를 인수하는 방법을 선택했고 ‘화신상회 매수공작’을 모색했다. 이에 경제공황 때 자금 유동성 위기에 봉착한 신태화에게 자금을 빌려주고 1931년 인수했다.
주식회사체제로 변경한 후에도 3년여 동안 신태화를 회장으로 추대한 것은 화신상회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기업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한편 ‘매수공작’의 소문을 의식해 이를 무마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박흥식은 화신상회를 토대로 (주)화신, 화신연쇄점, 화신무역 등 화신왕국을 건설함으로써 ‘백화점 왕’으로 불렸다.
신태화는 한말~1920년대 격변의 경제상황 속에서 금은세공업계의 ‘패왕’이라 불린 신행상회를 남대문통에 설립 경영하고, 이후 백화점의 대명사로 불린 화신상회를 창립한 인물이다. 그는 1877년 서울 남촌 무반가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가세가 기울자 13세 때 종로 금은방 사원으로 취직해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가 직공으로 출발해 자본을 모아 소공업체를 자영하다가 마침내 공장을 설립·경영하는 과정은 자본 축적의 새로운 양상과 경로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종래 지주·상인 자본의 제조업 투자나 자본전환에 대한 연구가 주로 이루어져온 반면, 수공업자·기술자 출신의 자본 축적 과정에 대한 분석은 많지 않다.
1902년 무렵 중곡염직공소를 설립한 직물업계의 김덕창과 함께, 신태화는 수공업자 출신으로서 기업가로 성장한 사례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신태화의 자본 축적 과정은 재벌 자본가의 경영 활동의 부침이 당시의 경제주기 및 상공업 동향과 어떻게 관련되고 있었는가를 알려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자본 축적의 수준과 그 의미
그러면 신태화가 축적한 자본은 어느 정도였으며 최대 자본을 축적한 시기 또는 축적속도가 가장 빨랐던 시기는 언제인지 등의 자본 축적 상황에 대해 살펴보자.
그는 13세부터 직공으로 일하여 약 6년 만인 19세에 40원을 모아 이를 기반으로 조그만 가내 공업체를 영위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약 13년 동안 축적한 4000원의 자본과 동업자 김연학의 4000원을 합쳐 32세에 비로소 소공업체를 확대해 공장(신행상회)을 설립했다.
일정한 자본력을 갖춘 신행상회는 그 자본 축적 속도가 소공업체 시기보다 매우 빨랐으니, 1908년 창립 시의 8000원은 1911~1915년 기간에 1만5000원, 그리고 1918년 이전 무렵 14만 원에 달했다. 그러면 신행상회에서 분리하기 전인 1918년 초 무렵 신태화의 개인 자산은 어느 정도였을까? 일단 신행상회 자본금의 절반인 7만 원은 그의 자산으로 봐야 한다.
그리고 1917년께 신태화 소유 경성 지역 부동산의 대지 가격을 시가(건물가 미포함)로 계산한 결과 최대 3만1265원에 달했다. 그러므로 신행상회 자본금과 파악된 부동산을 합하면 10만원에 조금 미달하는데 여기에 현금과 경성부 교외 소재 부동산 등을 합하면 적어도 15만 원 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론은 독자적 사업체인 화신상회의 1919년께 자본금이 15만 원인 사실로도 뒷받침될 수 있다. 이를 통해 신태화는 화신상회에 거의 대부분의 자산을 투자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화신상회의 초기 자본금은 15만 원이었는데 이후 1920년대에는 어느 정도의 자본을 축적했을까?
1927년께의 자료에서는 20만 원 정도라고 했는데 이는 불확실한 추정치이므로 검토를 요한다. 화신상회의 경영이 악화된 시점은 1930년 무렵 일본흥신소 경성지점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신태화의 1년간 상거래액은 80만 원이며, 재산 내역은 부동산 15만 원 기타 자산 26만3000원이고, 실질 자산은 14만 원이었다. 그렇다면 부채가 26만3000원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그는 1920년대에 20만 원 이상의 실질자산을 축적했으며 이는 1920년대 말 1930년대 초 공황을 거치면서 14만 원 내외로 축소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요컨대 화신상회 설립 후 1920년대 중반에 거래액 확대에 따라 외형적 자산이 크게 확대되었으나 실질 자산의 팽창은 그리 크지 않았던 셈이다.
그의 20만 원 자산의 상당부분을 축적한 시기는 바로 1916~1918년 무렵이었다. 이렇게 볼때 신태화의 자본 축적 사이클은 경제 주기 사이클과 거의 같은 궤적으로 움직였음을 알 수 있다. 즉 1915~1918년 호황기에 매우 빠른 속도로 자산의 대부분을 축적했고, 불황기였던 1920년대에는 사업 확장으로 오형 자산을 팽창했으나 자본 축적 속도는 상대적으로 더뎠으며 실질자산의 증가도 크지 않았다.
또 신태화의 사회적 활동은 두드러지지 않은 편이다. 1920년 동양염직주식회사를 설립한 김덕창은 기업 경영과 관련된 사회 활동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재계·사회계 인사들과의 교류에 적극적이었던 반면, 신태화는 경제 영역의 경영 활동에 국한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금융권의 지원을 보장받거나 재력가의 확보에 의해 투자를 유치하고, 혹은 경제 관련 정보를 획득하는 데에 현실적인 처세술이 아니었다. 다앙한 사회세력과의 연계를 통해 조선인 자본의 성장을 모색한 김덕창의 경제운동과 주요 은행의 지배인들로부터 전폭적인 금융 지원을 받음으로써 급성장할 수 있었던 박흥식의 ‘능수능대한 교제술’에 비교해 신태화의 ‘진충과 신용’은 식민지 중소기업가 앞에 가로놓인 벽을 뛰어넘기에는 나약한 관념이 아닐까?하는 의문을 갖게 만든다.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