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한국의 자본가들 ④ 현준호一家
근대 한국의 자본가들 ④ 현준호一家
  • 이범희 기자
  • 입력 2016-02-15 09:37
  • 승인 2016.02.15 09:37
  • 호수 1137
  • 29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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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은행장, 간척과 증미계획 몰두한 사연?

자본주의는 어떤 과정을 통해 한국에 정착될 수 있었을까? 자본주의가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있게끔 활발하게 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을 벌인 인물로는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초기 한국 자본주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묻고 넘어가야 할 질문들이다.

그러나 초기 한국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여전히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을 둘러싼 논란만 부각될 뿐, 정작 탐구해야 할 위의 문제들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뤄지는 듯하다.

그동안 ‘한국근대자본가연구(2002)’ 등의 저작을 통해 한국 자본주의 연구에 천착해온 저자 오미일은 근대의 다양한 자본가 군상을 그들의 사회적 신분이나 배경, 자본 축적 토대와 경로 등 몇 가지 기준에 의해 분류하여 각 유형의 대표적인 자본가들을 분석하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2014년 3월 출간했던 ‘근대 한국의 자본가들―민영휘에서 안희제까지, 부산에서 평양까지’는 그 결과물이다. [일요서울]은 이 책을 통해 자본주의의 정착과정을 재구성해본다. 그 네 번째는 ‘호남은행장, 그러나 관착과 증미계획에 몰두한 현준호一家’다.

식민지 시기의 경제 활동이 단절되지 않고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연계된 기업이나 가계는 많지 않다. 호남 지역의 경우 대표적으로 고창 지주로 출발해 경상방직을 설립한 김연수家와 영암 지역 지주로 출발해 이후 목포·광주로 기반을 옮겨 기업을 창립·경영한 호남은행의 현준호가를 들 수 있다. 그런데 김연수의 기업 활동 무대가 서울이었던 데 반해 현준호는 전남 지역을 근거로 활동한 재지지주라는 점에 양자의 차이가 있다.

현준호는 일제 시기 호남의 대표적 지주이자 기업가였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그 사업의 토대 위에 후손들이 설립한 기업체가 한국의 유수한 기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현준호는 1889년 8월 27일(음력) 영암군 학산면 학계리에서 현기봉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현씨 집안은 본관이 성산으로 증조부 때 조선 왕조 말기 혼란한 정세 속에 충청남도 천안으로부터 전남 영암 학계리로 이주했다고 한다.

부친 현기봉은 1891년 진사시에 합격해 영암군 향교 장의, 향약소 도약장 등을 지낸 향반이었다. 그는 칼날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일 처리에 빈틈이 없었고, 조부 인묵이 남겨 놓은 3000섬 농지를 두 배가 넘는 70000섬으로 증가시킬 정도로 이재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현기봉은 한말 호남 지방에서 의병운동이 격화되면서 종종 지주들이 공격 대상이 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1908년 치안상태가 나은 목포부로 이주했다. 그는 목포에서 여러 공장과 기업체를 새로 설립하거나 혹은 주식회사 이사로 경영에 참가했다.

그의 기업가로서의 비중은 66세 고령임에도 1921년 9월 조선총독부의 산업정책을 심의하기 위해 개최된 조선산업조사위원회의 전남 대표로 선정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또한 현기봉은 경제활동과 함께 사회정치적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했다. 1909년 목포부 민의장을 거쳐 목포부 참사, 전라남도 참서, 전남 관선 도평의회원을 두루 역임했다.

자본 축적 방식

1917년 데라우치 총독이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각 도부청 단위로 일본인과 친일 조선인 유력자들을 중심으로 기념품증정발기인회가 구성됐는데 그는 목포 대표 5명 가운데 유일한 조선인이었다. 1921년 경성에서 개최된 평화박람회발기인회에도 그는 목포 대표 4명 가운데 역시 유일한 조선인이었다.

조선총독부가 종래 귀족이나 고급 관료를 중추원 참의로 임명하다가 3·1운동 이후 지방 유력자에 대한 포섭으로 선회하자, 1921년 전남도지사가 그를 중추원 참의로 천거할 정도로 그는 목포를 대표하는 친일 성향의 조선인 유력자였다. 그의 정치적 성향은 ‘조선공로자명감’에서 “1919년 만세소요 때 세력 있는 전남 여섯 군에서 가담자가 한 사람도 나오지 않게 한 국사”라고 평가한 것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에 1924년에는 짧은 기간이지만, 사망하기 전까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호남 지방의 대표적 자본가인 현준호는 호남은행장, 그리고 전남도시제사, 동아고무공업, 영암운수창고, 경성방직,  조선생명보험의 중역으로 활동한 기업가로만 알려져왔다. 그러나 그의 물적 토대의 근간을 이룬, 자본 축적 시스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학파농장이었다. 현준호의 경제 활동의 축은 1920년에 설립돼 1942년 해산되기까지 은행장으로 있었던 호남은행과 함께 그의 기업 활동의 원천이었던 학파농장이었다. 학파농장은 현기봉이 사망한 1924년 설립돼 1934년 합명회사로 법인화됐다.

학파농장은 그의 주요 자산인 토지와 유가증권의 권리, 그리고 토지간척과 개량을 주요 영업 내용으로 했다. 그는 부친으로부터 토지를 물려받은 1920년대 중반부터 대단위 농지를 조성하기 위해 매도와 매입을 통해 경지정리를 추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는 대단위 농지조성이 요원하자 1932년부터 간척사업을 전개했다.

또한 학파농장은 동척이나 식산은행에서 방출했던 산미증식토지개량 자금과 같은 저리의 국책자금을 차입함으로써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었다. 이러한 특혜자금을 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단지 ‘우량 거래처’이기 때문만 아니라 전남도평의회원, 중추원 참의로 일제 지배체제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었던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학파농장의 평균 수익률이 높았던 요인으로는 농장형 지주 경영과 농사 개량 등의 요인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우량 유가증권에 대한 투자를 통해 정기예금 금리의 두 배에 이르는 배당 수익을 올린 것도 평균 수익률 증가에 기여했다.

금융기관으로부터의 차입 시 학파농장 명의로 차입할 경우에는 현준호가 보증을 섰다. 그러나 현준호 명의로 대출할 경우에는 대개 농장 지배인이 보증을 섰다. 농장 지배인은 농업 경영에 숙련된 지식뿐만 아니라 금융기관으로부터의 일상적인 대출 시 보증인이 될 정도의 능력이 있는 자산가여야 했다. 때문에 학파농장의 지배인은 대개 면협의원, 금융조합장 등으로도 활동하는 지역 유지급 인물이었다.

현준호는 여러 지방 중소기업의 주식을 보유하고 이사로 활동하고 있었지만, 여기에 자신의 많은 자본을 투자해 직접 경영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가 토지에서 동원된 자본을 기업에 투자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직접경영에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았던 이유는 지방 중소기업 경영을 통한 이윤이 크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현준호가 ‘조선공업화’가 한창이던 시기에 산미증식사업의 부활을 계속 당국에 건의하고 간척사업을 통한 농지 확대와 농업 경영을 자본 축적의 길로 삼았던 것은 식민지 말기 지역 자본가 존재 양상의  한 유형을 보여준다.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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