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 ㅣ 이범희 기자] 땅콩회항사건·몽고식품 운전기사 폭행사건 등 이른바 갑질사건의 공통점은 지위적 약자를 대상으로 이뤼졌다는것이다. 피해자는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가장들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피해자는 나이 어린 오너에게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도 참는건 가족 때문이라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일요서울]은 그동안 알려진 갑질논란은 물론 아직도 수면 아래서 이뤄지는 갑질에 대해 알아본다.
최근에는 A사의 갑질논란이 주변인들 사이에서 소문처럼 퍼지고 있어 조만간 급부상할 것이란 추측도 많다.
“나는 인간이 아니었다” 폭로…외모 농담 잦아도 불쾌한 내색 못해
상사의 개인사는 ‘알고도 모른 척’…처우개선하려 전문비서협회 꾸려
그렇다면 이러한 갑질이 과연 무슨 문제가 있을까? 가장 먼저 을에게 육체적 피해와 정신적 피해를 입힌다. 이 과정에서 을은 폭행을 당해도 제대로 저항하는 것이 쉽지 않다. 특히 어느 정도 치료가 가능한 육체적 피해와는 달리 정신적 피해는 쉽게 치료하기도 힘들다. 이 심각한 정신적 피해를 입고 난 후유증으로 자괴감, 우울함, 무기력함 등은 자살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만든다.
최근 회자된 몽고식품 김만식 회장의 폭행사건 피해자가 언론인터뷰에서 “처자식을 먹여 살리려고”라며 말 끝을 흐린 전례가 있다.
실제로 갑질 피해자 대부분은 집안의 가장이거나 누군가의 부모인 경우가 많다. 다수의 피해자들은 “먹고살기 힘들어 부당함 속에서도 어린 오너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꾹 참는다”고 입을 모은다.
이들이 겪는 직업적 고충 또한 남다른 듯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상사복이 임금보다 더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그만큼 수행비서들은 어떤 상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회사 생활의 만족도가 크게 달라지는 직업이다. 업무 외 시간의 자유 또한 상사의 스타일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업무시간에도 항시 상사의 지시를 대기해야 하기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는 것이 이들의 숙명이다. 이 때문에 화장실도 맘 편히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일요서울]과 만난 한 수행비서는 “사고는 오너가 치지만 뒷수습을 하는 건 언제나 나와 동료들의 몫이었다”며 “월급 받는 입장에서 때로는 죄인이 된 것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는 사고 수습을 위해 머리를 조아리는 역할도 해야 했다는 것이다.
실제 갑질 논란이 불거진 기업의 홍보담당자들은 “오너의 개인사라 공식입장은 없다”고 말하면서도 보도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언론사를 찾아다니며 읍소하는 경우가 많았다.
학문의 전당인 대학 안에서도 ‘갑-을’ 관계는 존재한다. 가장 대표적인 게 교수와 조교 관계다. 조교는 대학에서 ‘교육·연구 및 학사에 관한 사무를 보조’하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하지만 실제로 조교가 하는 일은 연구 기자재 관리, 교육업무 보조, 탕비실 설거지, 교수 휴게실 청소, 학생 답안지 채점까지 안하는 일이 없을 정도로 많다.
서울 사립대의 연구조교인 C씨는 “연구조교는 교수의 연구를 지원하는 게 주 업무지만 교수를 대신해 심부름을 다녀오거나 교수 개인 약속 때문에 식당을 알아보는 일도 허다하다”고 말했다.
나는 조교다
비서 역할을 하더라도 무사히 학업만 마치면 다행이다. 지도교수를 수행하면서 틈틈이 논문을 완성했는데 이를 송두리째 빼앗기는 일도 드물지 않다.
조교들이 교수의 부당한 요구나 지시에 항명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거의 대부분 조교가 대학원에서 학업을 병행하는 학생이어서다.
또 대학원생 중 조교를 선발하는 권한은 대부분 교수가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상당수 조교들이 교수의 개인 비서 역할을 감내한다. 김 씨는 “지도교수란 스승이기 이전에 내 목줄을 쥔 인사권자”이라고 말했다.
최근 들어서는 검찰과 여의도 일대에서 유명기업 회장의 안하무인식 행동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 오너 2세인 A회장의 수행비서가 자주 교체되는데 그 이유가 역시 갑질이라는 것이다.
이미 전임 운전기사의 입단속을 마무리했다는 이야기도 흐르고 있지만, 이중 한 명이 검찰과 언론을 대상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특히 이 운전기사는 A회장의 개인사부터 회사자금 유용 등 10여년을 모시면서 불미스러운 일(?)을 전부 도맡아 한 만큼 이 사실이 폭로되면 검찰수사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그러나 이 수행비서 또한 가족에게 괜한 불똥이 튈까 두려워 쉬쉬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처럼 수행비서 대부분은 부당한 처우를 받아도 어디에 하소연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이에 따라 전문비서들이 자신들의 열악한 처우를 바꾸기 위해 ‘조합’을 만들었다. 전·현직 비서 80명은 최근 직능조합 형태로 비서들의 모임인 ‘전문비서협회’를 출범했다.
노경은 전문비서협회 초대 회장은 “지금까지 비서들이 부조리한 현실에 처해 있으면서도 집단적인 목소리를 낼 통로가 부족했다”며 “앞으로 비서들이 전문 직업인으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구심점 역할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전국에 1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 비서직 대다수가 비정규직이어서 인사팀이나 노조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고 한다. 한국팔로워십센터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지난해 10월 한달 동안, 비서 채용 전체의 76.1%가 파견직이나 계약직 같은 비정규직 형태였다.
협회는 수행기사를 수시로 폭행한 몽고식품 회장 쪽에 항의 서한을 보낸 데 이어, 기업이 정규직 비서를 채용할 경우 협회 차원에서 해당 업체에 비서 전문교육을 제공하는 등 정규직 비서 채용을 장려하는 캠페인을 벌일 계획이다.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