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역에서 겐트로 향했다. 기차는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무척 한산했다. 브뤼셀에서 고속 기차를 타고 북서쪽으로 30분 정도가 걸리는 곳. 나는 빨리 가는 방법을 버리고 일부러 완행을 타고 가기로 했다. 벨기에의 작은 역들과 목가적인 풍경이 창가를 스쳤다. 중세의 느낌이 온 도시를 뒤덮는 조그마한 도시인 겐트. 겐트 역에 도착해 트램을 타고 시내로 들어갔다.
백작의 성, 흐라븐스틴
겐트의 중심부에 내려 흐라븐스틴(Gravensteen) 성으로 향했다. 중세 시대 백작의 성곽으로 쓰이다가 박물관으로 용도변경된 이 성의 무게감은 도시의 중심을 잡아주는 듯했다.
겐트 자체가 이 성을 중심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이 성이 겐트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치 중세로 향하는 듯한 견고한 분위기의 입구가 그런 유추를 가능하게 했다. 거친 돌들이 놀랄 정도로 질서 있게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겐트 시내의 중세 건축물들은 모두 큼직하게 지어졌다고 한다. 13세기 이 전부터 발전하기 시작한 방직 산업이 도시에 막대한 부를 안 겨준 덕으로 당시 겐트는 유럽에서 파리 다음으로 번성했다고 한다.
성은 그간 교도소와 법원, 공장 등 여러 용도로 사용돼왔고 고문실로도 쓰였다. 내부에는 실제로 쓰인 다양한 고문 기구들과 단두대가 전시돼 있어 현실감을 더했다. 성 꼭대기 층에서 겐트 시내를 조망할 수 있다고 해 오르기로 했다.
겐트를 대표하는 세 곳의 기념비적 스카이라인인 성 니콜라스교회와 종루 그리고 바프대성당이 모두 한 포인트에 담긴다. 파란 하늘 아래 뾰족하게 솟은 상징과 기호들. 겐트 사람들의 남다른 회화적 감각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어린 양에 대한 경배’가
모셔진 성바프 대성당
겐트를 찾는 사람들이 가장 가치를 두는 곳인 성 바프 대성당은 브뤼셀의 미셀 대성당보다 더 웅장했다. 세계적인 화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5-1441)의 작품이 성물처럼 보관되어 있어 더욱 유명한 이곳은 처음에는 목조건물로 시작되었으나 차츰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양식이 혼재되어 증축되었다고 한다.

얀 반 에이크의 작품 ‘어린 양에 대한 경배’를 볼 수 있는 별실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돈을 지불해야 하지만 성당 뒤편으로 가면 사진 촬영이 가능한 복제화를 감상하는 공간이 따로 있다. ‘어린 양에 대한 경배’는 플랑드르 화풍을 대표하는 역사적인 명작이며 인류의 유산이라 칭해도 좋을 정도로 종교화의 정점에 있는 작품이다. 이탈리아와 러시아에서 온 신자들은 작은 복제품임에도 불구하고 환희와 숭배로 그 기록적인 그림을 대했다.
또 하나의 세상,
겐트의 야경
겐트의 저녁은 비교적 일찍 시작되는데, 레이에 강변에서 뜻밖의 광경을 마주했다. 그것은 강 주변으로 펼쳐진 겐트의 야경이었다. 벨기에를 여행했던 사람들 대부분은 브뤼셀의 그랑 플라스 야경에 집중했던 탓인지 이곳의 야경에 대해선 별 언급이 없었다.
하지만 겐트에서 보여주는 이 어스름한 저녁의 풍경은 단숨에 겐트를 중세에서 동화 속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만약 시간에 단계라는 것이 있다면 이 시간이 태초의 것이 아닐까. 그만큼 겐트의 야경은 맑고 무구했다.


<프리랜서 이곤 기자>
<사진제공=여행매거진 고온 GO-ON>
프리랜서 이곤 기자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