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어떤 과정을 통해 한국에 정착될 수 있었을까? 자본주의가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있게끔 활발하게 자본주의적 경제 활동을 벌인 인물로는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초기 한국 자본주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묻고 넘어가야 할 질문들이다.
그러나 초기 한국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여전히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을 둘러싼 논란만 부각될 뿐, 정작 탐구해야 할 위의 문제들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뤄지는 듯하다.
그동안 ‘한국근대자본가연구(2002)’ 등의 저작을 통해 한국 자본주의 연구에 천착해온 저자 오미일은 근대의 다양한 자본가 군상을 그들의 사회적 신분이나 배경, 자본 축적 토대와 경로 등 몇 가지 기준에 의해 분류하여 각 유형의 대표적인 자본가들을 분석하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2014년 3월 출간했던 ‘근대 한국의 자본가들―민영휘에서 안희제까지, 부산에서 평양까지’는 그 결과물이다. [일요서울]은 이 책을 통해 자본주의의 정착과정을 재구성해본다. 그 첫 번째는 ‘관료에서 기업가로 전환한 민영휘 일가’다.
1912년 8월 민영휘는 한일은행 이사로 선출됐다. 전무 백인기가 지배주주로 되면서 초대사장인 조병택을 퇴진시키고 중역 개편을 단행하면서 민영휘를 영입했다. 1915년 3월 대출과다와 불황으로 인해 경영 위기가 닥치자, 그 책임 문제로 백인기가 사임한 후 민영휘가 은행장으로 추대되었다.
한일은행을 시작으로 한 민씨 일가의 기업 투자는 2세에 이르러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20년 민영휘는 70세의 고령이 되자 한일은쟁장에서 퇴임하고 2세들이 경영 일선에 나섰다. 민영휘에게는 슬하에 4남 2녀가 있었다.
장남 민형식은 양자였기 때문에, 실제 민영휘의 자산을 상속받아 운용한 이는 이남 대식과 삼남 규식이었다. 신문물에 밝았던 대식은 한말부터 직접 기업을 설립해 경영에 나서거나 여러 기업에 투자했다. 1920년 이후 한일은행장으로 활동하면서 재계 거물로 부상했다.
동생 규식은 1912년 유학길에 올라 외국문물을 익히고 1920년 5월 귀국해 한일은행 상담역, 그리고 다시 한 달 후 상무이사로 취임하면서 경영 실무를 익혔다.
자본 축적의 특징
한말 고급관료였던 아버지 민영휘는 권력에 의거한 수탈을 통해 토지를 집적, 자본을 형성했다. 이 자본을 기초로 이후 금융권에 진출해 한일은행장이 되면서 재계에서 기업가로서의 입지를 구축했다.
3세대 민대식과 규식은 제조업에 투자하여 부국직물, 조선견직과 같은 기업체를 경영하기도 했으나 자본 축적의 주요 토대는 토지 소유와 농업경영, 건물 임대 등 부동산 투자에 있었고, 부수적으로 주식투자를 겸했다.
이러한 보수적인 자본 투자 방식 선상에서 체계적인 자산 관리를 위해 1933년과 1935년에 각기 설립한 가족회사인 영보합명회사와 계성주식회사는 10년이 못 되어 3~4배 성장했다.
그러나 전시기에 들어서 양자의 행보는 나뉘었다. 영보는 거액의 대출자금을 군수산업에 투입했으나 계성은 일제의 조선증미계획에 보조를 맞춰 토지 개량과 농업 경영을 고수했다.
기업의 몰락과 성장이 부침했던 1930년대 중반~1940년대에 이러한 확대 성장과 자본 축적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 국책금융기관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영보와 계성은 금융기관에서 정한 최저금리보다 더 낮은 이자로 총자산의 15~20퍼센트에 이르는 차입금을 동척으로부터 장기대출 받아 토지 구입과 농사 개량, 건물 신축, 제조업 투자와 유가증권 투자 등을 통해 자본을 축적해나갈 수 있었다.
2세대에 와서 유가증권의 비율이 높아졌다고 하나 민대식과 민규식의 부동산 보유 비중은 유가증권에 비해 두 배가 휠씬 넘었다. 그런데 전국에 소재한 토지와 임야(대지)의 관리를 위해서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믿을 만한 마름의 존재가 중요했다.
예를 들어 1930년대에 민대식의 마름 중 한 사람은 강번이었다. 강번은 민대식이 사장이었던 한일은행에서 지점 지배인, 서무과장에서 출발해 이사로 승진한 인물이다.
또한 한일은행이 현물보관 창고로 1924년 설립한 남창사의 감사이기도 하다. 남창사가 1929년 대전에 설립한 운수창고업 회사인 선남창고의 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민대식의 농사 경영도 맡았다.
1924년경 민대식의 동척 대출 때 채무보증인 강번에 대한 동척의 ‘신용조사서’에선두 사람의 관계를 ‘주종관계’로 표기했는데 ‘마름’ 강번은 배재학당 졸업 후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을 수료한 엘리트였다.
1935년 무렵 충남 대전부회의원과 대전상공회의소 부회두를 지낸 그가 같은 시기 민대식의 마름으로 일했다는 사실은 민씨가의 사회적 지위와 인맥관계가 대단했음을 알려주는 흥미로운 사실이다.
한편 민씨 일가가 이러한 경제적 특수의 수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일제 경제 정책에 부응해 시기별로 미간지 개척, 토지 개량과 산미증식, 군수기업 경영과 투자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또한 자본 축적의 연장선상에서 정치사회적 활동을 통해 지배체제 유지에 적극 협력했기 때문이다.
민영휘는 일제의 보호통치 하에서 대신이 되기 위해 수차례 이토 통감을 비롯한 일제 고위 관헌에게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접대하면서 업관 행강을 벌였다. 그리고 병합 이후 ‘조선귀족령’에 따라 일제가 수여한 자작 작위와 함께 5만 원이라는 거액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민대식은 ‘내선융화의 철저한 실행’을 강령으로 조직한 친일단체 동민회의 평의원으로 1924~1929년 동안 활동했다. 1935년 11월에는 일제가 사상범 통제를 목적으로 조직한 소도회의 이사로, 민규식과 함께 활동했다.
민규식 역시 1925~1929년 동민회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1938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인의 전쟁 동원과 임전체제 유지를 위해 외곽단체로 조직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이사·평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940년 이후에는 이를 개편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평의원·이사로 일제 전시체제에 적극 협력했다.
1890년데 이후 1세대 민영휘에서 시작된 자본의 형성과 2세대 민대식, 규식에 의한 자본 축척 과정은 한국 근대 자본주의 발달사에 관료로 출발하여 기업가로 전환한 대표 사례로, 한국 자본주의의 일면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보기라고 할 것이다.
<정리 =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
<출처 = 오미일(지은이) / 푸른역사>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