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권 밖 박근혜 사람들, 정당인·언론인 등 접촉
대구 이어 경북 일부서도 흔적… 중진 용퇴론도 솔솔
[일요서울 | 류제성 언론인] 박근혜 정부의 산실(産室)인 대구·경북(TK)의 선거판이 요동치고 있다. 4·13 총선을 70여일 남겨두고 새누리당의 자칭 진박(眞朴·진짜 친박, 진실한 친박) 후보들이 출마할 지역을 놓고 교통정리가 이뤄지는 가운데, 그들끼리 공동전선을 형성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이 과정에서 TK 유권자들이 반발하면서 역풍이 일어나는 현상도 벌어진다. 그러자 친박계 핵심에서 TK 민심을 면밀히 파악하고 기존에 출사표를 던진 ‘대통령의 사람들’ 외에 새로운 인물을 물색하기 위해 ‘비밀 팀’을 꾸려서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기도 한다.
박근혜 정부에서 요직을 지내고 지금은 정치권 밖에 머물고 있는 A 씨는 최근 현지 언론인과 정치권 주변 사람들을 만나 여론을 청취한 뒤 비밀 보고서를 친박계 핵심 B 의원에게 올렸다고 한다. A씨를 도와 청와대 참모 출신으로 대구가 고향인 C씨 등이 지역 사람들을 소개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보고서에는 일부 출마자들의 선거구 조정 필요성과 함께 친박계 신진들의 경선 전략도 상세하게 적힌 것으로 전해진다. 가령 “여러 곳에서 진박, 가박(假朴·가짜 친박) 논란이 일어나고 있는 만큼 유권자의 혼선을 막기 위해 진박 예비후보들이 ‘스크럼’을 짜는 방법도 검토해야 한다”는 식이다.
실제로 대구 총선에 출사표를 던진 진박 후보 6명은 1월 20일 오전 대구 남구 대명동의 한 식당에서 조찬회동을 가졌다. 정종섭 전 행정차지부 장관(동구갑), 추경호 전 국무조정실장(달성군), 이재만 전 동구청장(동구을), 하춘수 전 대구은행장(북구갑) 곽상도 전 청와대 민정수석(중-남구) 윤두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서구)이다.
‘진박 후보’ 6명 출사표
이들은 보도자료를 통해 “대구지역 국회의원 예비후보 6명은 대구발전과 박근혜 정부의 성공을 위해 앞으로 행동을 같이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설명했다. 또 “바닥권에 있는 대구 경제를 살리기 위해선 박근혜 정부가 힘을 쏟고 있는 민생정치가 보다 빨리 실현돼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대구 지역 의원들의 헌신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 부족했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앞으로 정례적인 회동을 통해 대구 발전 방안을 논의하기로 했다. 대구의 새누리당 예비후보 가운데 ‘진박 연대’가 형성된 셈이다. 18대 총선 때 친박계가 MB(이명박 전 대통령)계에 공천학살을 당한 뒤 ‘친박연대’ ‘친박 무소속연대’를 결성해 TK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일을 연상 시킨다.
특히 이들 6명은 자신들만이 대구의 ‘진박’ 후보라며 ‘박심(朴心·박 대통령 의중) 마케팅’에 노골적으로 나섰다. 대구의 새누리당 예비후보자 대부분이 스스로 ‘진박’이라고 주장하자 박근혜 정부 각료, 청와대 참모 경력을 내세워 자신들만이 ‘진진박’(眞眞朴)이라며 차별화에 나선 모양새다.
6인 연대 멤버들은 실제로 여권의 ‘보이지 않는 손’이 짠 시나리오에 따라 대구에 차출되고 출마 지역구도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인위적으로 정해진 흔적이 역력하다.
곽상도 전 수석은 당초 박근혜 대통령의 지역구였던 달성군에 출사표를 던졌다가 친박계 핵심 D 의원과 교감을 나눈 것으로 알려진 추경호 전 실장이 내려오자 망설이지 않고 중-남구로 지역을 옮겼다. 이 지역의 현역 이종진 의원은 추 전 실장에게 ‘박심’이 실렸음을 읽은 때문인지 총선 불출마와 추 전 실장 지지를 전격 선언했다.
이 의원은 불출마 선언 불과 며칠 전에 대구의 현역으론 최초로 예비후보로 등록해 표밭을 누비던 중이어서 교통정리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는 관측에 무게가 실린다. 심지어 이 의원이 총선 불출마의 대가로 다른 요직을 보장받았을 것이란 소문도 나돈다.
정종복 전 장관은 당초 고향인 경주에 뜻이 있었지만 대구로 차출됐다. 그가 출마하는 동구갑은 ‘국회법 개정 파동’ 때 유승민 당시 원내대표의 입장을 지지했던 류성걸 의원 지역구다. 정 전 장관과 유 전 원내대표, 류 의원은 모두 경북고 57회 동기다. 이 때문에 친박계가 류 의원을 응징하기 위해 동기생을 ‘자객공천’ 했다는 말까지 나온다.
유 전 원내대표의 지역구인 동구을엔 이재만 전 동구청장이 도전장을 냈다. 이 전 구청장은 원래 친박계가 아니었다. 만일 유 전 원내대표 지역구에 청와대 참모 출신이 출마하면 너무 노골적인 표적 공천이 되기 때문에 계파색이 엷으면서도 동구에서 인지도가 높은 이 전 구청장을 내세워 차도살인(借刀殺人)을 시도한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하춘수 前행장 등장에 억측
하춘수 전 대구은행장의 갑작스런 등장도 갖가지 억측을 낳고 있다. 원래 북구갑에는 전광삼 전 청와대 춘추관장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곳엔 김종필 전 청와대 법무비서관도 출사표를 던졌었다. 하지만 무슨 막후 움직임이 있었는지 김 전 비서관은 돌연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 직후 전 전 관장은 자신의 고향이 있는 경북의 영양-영덕-봉화-울진으로 옮겨갔다.
그러자 정태옥 전 대구시 행정부시장이 ‘진박’을 자임했다. 부인인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자유무역협정교섭관이 박근혜 정부 청와대에서 외신비서관을 지낸 경력도 회자됐다. 하지만 이곳에 하 전 행장이 투입되면서 기류가 변하고 있다. 하 전 행장은 “나는 친박도 가박도 아닌 ‘하박’(하나의 박, 하나님의 박)”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지금 상태로 대구의 새누리당 경선구도가 굳어질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제2, 제3의 추경호, 하춘수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보이지 않는 손’, ‘비밀 팀’이 유승민 전 대표를 도왔던 대구 초선 의원 7명을 탈락시키기 위해 여론을 면밀히 살펴보는 까닭이다. ‘진박’ 예비후보들의 지지율이 현역 의원을 따라 잡을 기미가 없으면 언제든 선수를 교체할 태세다.
‘보이지 않는 손’의 영향력은 대구에 머물지 않고 경북으로 뻗치고 있다. 김정재 전 서울시의원이 포항 남-울릉 예비후보를 사퇴하고 포항 북으로 선거구를 옮긴 게 대표적이다. 김 전 의원은 2014년 6·4 지방선거 때 새누리당 포항시장 후보 경선에서 고배를 마신 뒤 포항 남-울릉 총선을 쭉 준비해 왔다.
최근 포항 북이 지역구인 이병석 의원이 불법정치자금 의혹으로 검찰의 수사대상에 오르는 변수가 생기자 지역구를 옮기는 과정에서 친박계의 입김이 작용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새누리당 한 관계자는 “친박계 핵심 인사가 김 전 의원에게 북구로 옮기라고 종용한 것으로 안다. 김 전 의원은 처음엔 ‘명분이 없다’며 버텼으나 결국 압력을 이기지 못했다”고 귀띔했다.
이와 유사한 일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총선 출마자의 공직사퇴 시한(1월 14일)은 이미 지났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청와대와 내각, 공공기관 등에서 캐리어를 쌓은 예비자원은 충분하다. 대구 수성갑에서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전 의원에게 고전 중인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를 중도하차 시키고 다른 인물을 교체 투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친박계에서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은 출마자 지역구 조정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종진 의원의 경우처럼 현역 의원을 백기투항 시키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대구 정가에선 본인의 강력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류성걸, 권은희 의원(북구갑) 등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아울러 이종진 의원이 66세로 비교적 고령에 해당한다는 점을 들어 TK 지역의 중진이나 고령 의원들이 줄줄이 용퇴할 것이란 소문마저 나돌고 있다. 이래저래 바람잘 날 없는 대구·경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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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제성 언론인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