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 | 김현지 기자] 대립된 성향을 보이는 두 온라인 커뮤니티와 포털 사이트에 검색어로 ‘은퇴, 명예퇴직’을 입력했다. 검색 결과 내용은 한결같았다. ‘아버지 세대의 모습’이라는 것과 ‘집에서의 위상이 예전과 다르다’는 등의 부정적인 평이었다. 덧붙여 여러 블로그 및 댓글에선 ‘아내에게 폭언·폭행을 당한다’는 내용도 더러 보였다. 한국사회의 경기침체 중 5060 세대들이 겪는 고충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편안한 노후는 옛말, 내 집도 안 편해
상담하는 남성 많아져…어두운 단면
평일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오후, 서울시 용산구의 한 공원 모습을 잠시 들렀다.
음식점이 즐비한 뒤편에 자리 잡은 작은 공원에 빼곡히 앉은 이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남성’들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남성이라는 점 외에, 나이가 50세 이상은 되어 보인다는 것과 근처에 거주하는 듯한 차림새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스무 명 남짓의 남성들 중 일부는 서로 구면인 듯 대화를 하고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말없이 먼 곳을 응시하거나 삼삼오오 모여 있는 비둘기에게 과자를 주고 있었다.
길을 묻기 위해 세 명의 남성과 대화를 하게 됐다. 대화 말미에 ‘이 근처에 사시는지’를 여쭸다. 모두 ‘그렇다’고 답했다. 이들 중 한 명은 이야기를 하기 좋아하는 듯 스스럼없이 “집에 최대한 늦게 가려고 난 일부러 집과 먼 여기까지 온다”며 “아내랑 하루 종일 붙어있기 싫다”고 말했다. 그 이유를 묻자 이 남성은 “돈을 잘 벌어올 땐 별 말이 없더니, 이제 돈도 못 벌어온다고 타박해 현재 경비원 같은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다”며 “나는 그나마 양반이다. 내 또래 친구들 중 아내와 황혼이혼을 하거나, 매일같이 폭언을 들으며 싸우는 경우도 상당하다”고 덧붙였다.
공원을 떠나는 길 멀리서 ‘아내’, ‘일자리’란 단어를 언급하는 대화 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은퇴 한파
경기침체로 기업들의 명예퇴직 및 구조조정 한파가 심각해지고 있는 가운데, 5060 세대들의 한숨 역시 깊어지고 있다. 2013년 고령자고용법 개정을 통해 60세 이상 정년이 법제화된 데 이어, 지난해 5월 공공기관을 시작으로 임금피크제(일정 연령에 도달한 근로자의 임금을 삭감하는 대신 고용을 보장하는 제도) 적용이 가속도를 밟고 있지만 이 역시 ‘일부’에 해당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미 자신의 일을 그만 둔 5060 세대에게 임금피크제 등 취업구조 변경은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런 5060 세대들은 경기한파를 직접 체감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외부에서는 물론, 가정에서조차 불안한 위치에 처해 있어 현 사회의 부정적인 한 단면으로 대두되고 있다.
가정 내 불안한 위치의 대표적인 사례로 ‘경제력 상실’이 지목된다. 맞벌이를 해야만 하는 현재의 젊은 세대들과 달리, 대다수 5060 남성들은 젊은 시절 외벌이를 했다. 자연스레 이들은 일을 하는 동안 가정 내에서 경제력을 중심으로 한 주도권을 가지기 쉬웠다. ‘돈벌이가 곧 가정 내 주도권 취득’의 구조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는 돈벌이가 없으면 곧 주도권이 상실된다는 것을 내포한다. 현재 은퇴 등 일을 하지 않는 5060 남성들의 애환도 여기에 있다는 목소리가 있다. 특히 아내의 무시와 폭언은 물론, 심지어 폭행으로까지 이어지는 사례가 과거보다 늘어나고 있어 문제가 심각하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서울시, 경기도 일대에서 1990년대에 건설업 사업을 크게 벌였던 A(62)씨. 한 달에 당시 시세로 몇 십 억에 달하는 돈을 만져봤다는 A씨의 사업은 IMF를 맞아 무너졌다. 이를 기점으로 그의 가정 생활은 파탄났다. 가사일만 전담했던 A씨의 부인은 식당 등 다양한 일을 전전해야 했고, A씨는 사업에 재기하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는 일만 했던 것. 이는 곧 A씨 부인의 폭언으로 이어졌다.
A씨는 “당시 대기업 등 소위 ‘월급쟁이’들과 다른 삶을 살았고, 그만큼 씀씀이가 컸다”며 “내가 돈을 잘 벌어왔을 때는 아내와 사이가 좋았는데, 일을 그만두고 나니 돌아오는 건 한숨소리와 폭언이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회상했다.
직장을 다녔던 B(58)씨의 상황 역시 A씨와 다르지 않다. 2년 전 다니던 직장에서 권고사직을 한 B씨는 이후 아내와 생활비를 두고 사소한 다툼을 시작했다. 최근 소일거리를 시작한 아내와 달리 B씨는 떳떳한 직장이 없는 데다,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아내가 ‘폐지라도 주워라’는 등의 폭언을 했기 때문이다.
B씨는 “처음엔 반찬 등 사소한 생활비에서 시작됐지만, 점차 내가 친구들과 만나 사용하는 밥값은 물론 교통비까지 문제를 삼았다”며 “지난해엔 결혼 이후 처음으로 아내가 내게 의자를 집어던졌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의자에 어깨가 맞았는데 이후 아내가 심심찮게 물건을 내게 집어던지는 등 과거와 달리 폭언 등을 일삼는 빈도수가 늘어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동영상 떠돌기도
몇 해 전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매 맞는 남편 동영상’도 이런 문제의 심각성을 더한다. 현재는 재생이 되지 않지만, 과거 이 동영상을 본 사람들의 전언에 따르면 아내의 폭행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남편의 모습이 이 영상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양성평등을 목적으로 발족한 일부 단체들은 이런 문제와 관련된 상담을 받아왔지만, 동영상을 통해 직접 실태가 드러난 건 처음이었던 셈이다.
가정 문제에 대해 상담을 하는 한 단체의 관계자는 “과거보다 아내의 폭언·폭행을 상담하는 남성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아무래도 이전보다 상담을 덜 꺼려하는 문화도 작용하는 것과 동시에, 실제로 일거리를 상실한 중·장년층의 가정 내 위치가 예전과 다르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김현지 기자 yon88@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