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 | 수도권 강의석 기자] 2016년 수원화성 방문의해를 맞이해 수원화성의 역사적 가치와 그 유래 그리고 화성의 유적 몇몇을 살펴보면서 방문객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대표 유적들을 만나봤다.
수원 화성(華城)은 조선후기 정조(正祖)시대 성곽과 많은 부속건물, 도시기반시설과 생산기반시설들의 총화로 이루어진 자족적(自足的) 계획도시로 알려져 있다.
화성성역(華城城役)은 조선후기 변화하는 세계정세 속에 외래문화를 수용하면서 주체적이고 실용적인 태도, 전통적인 것을 토대로 새로운 것을 창안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에 의해 만들어졌다.
1794년 1월 7일 돌을 채취하는 것을 시작으로 26일 총리대신(總理大臣)에 우의정 채제공(蔡濟恭 : 1720년~ 1799년), 감동당상(監董堂上)에 화성유수 조심태(趙心泰 : 1740년~1799년)를 임명해 사업을 진행했으며 국왕으로부터 신료와 일반 백성의 노력이 결집돼 2년여 만인 1796년(정조20) 9월에 공사를 마친 뒤, 10월 16일 낙성연(落成宴)을 열고 완성했다.
사적 제3호로 지정된 화성은 전체 길이 5744m로 대부분을 돌로 쌓았으며 일부 중요한 방어 시설은 벽돌로 쌓았다. 4개의 성문과 5개의 암문, 2개의 수문, 2개의 은구, 2개의 장대, 2개의 노대, 3개의 공심돈, 4개의 각루, 5개의 대포를 설치한 포루, 5개의 포루, 1개의 봉돈, 8개의 치, 3개의 포사, 용도 등의 시설물이 있다.
화성성역은 국왕 정조의 장기적 정치 구상에 따라 훗날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웅거할 정치적․군사적 거점으로 추진됐지만, 이는 조선왕조의 발전방향이나 당시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면서 새로운 상업과 농업, 교통과 상품 유통의 중심도시로 건설됐다.
이 원대한 구상은 신민(臣民)의 협조와 참여에 힘입어 실현될 수 있었다. 신도시를 건설하는 실제적 구상과 작업과정에는 중흥을 맞았던 조선 문화의 세련된 수준이 충분히 반영됐으며 정조의 의지 외에 여러 신료의 학문과 경륜, 민(民)의 호응, 그리고 조선정부의 충실한 재정과 운용능력 및 조선왕조의 경제적 문화적 역량 등이 총체적으로 투입돼 왕조 중흥과 왕권 강화의 표상이라고 할 위대한 민족문화유산의 창출이라고 할 수 있다.
화성 신도시를 둘러싼 시설인 화성 성곽은 조선의 고유한 성곽 특징을 잘 갖추고 있으면서도 조선 후기까지 축적된 전통적 성곽 건설 경험과 중국으로부터의 최신 과학 지식을 수용한 뛰어난 성곽으로 평가 받아 1997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수원 팔달문

팔달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남쪽 문으로 남쪽에서 수원으로 진입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정조대왕과 당대 국왕들이 현륭원을 가기 위해 이곳을 통과했다고 한다.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해 9월 15일에 완공했다.
팔달문은 모든 곳으로 통한다는 '사통팔달'에서 비롯한 이름이며 축성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402호로 지정됐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달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수원 화서문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403호로 지정됐다.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던 채제공(蔡濟恭)이 썼으며, 옹성 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는 성문공사를 담당했던 사람과 책임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수원 방화수류정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와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정자의 기능을 함께 지니고 있다.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訪花隨柳)”라는 뜻을 지닌 방화수류정은 독특한 평면과 지붕형태 때문에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화성에서 가장 뛰어나며 다른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독창적인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다.
서북공심돈은 적의 동향을 살핌과 동시에 공격도 가능한 시설로 수원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1796년(정조 20) 3월 10일 완공된 서북공심돈은 3층 건물로 아래쪽 부분의 치성(雉城)은 석재로, 위쪽 부분의 벽체는 전돌로 쌓았다. 내부는 전투에 편리한 구조를 갖추었으며 계단을 통해 오르내렸다.
1797년(정조 21) 1월 화성을 방문한 정조는 서북공심돈을 보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니 마음껏 구경하라”며 매우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
독창적인 건축형태와 효과적인 재료 활용을 보여주는 서북공심돈은 역사적, 학술적,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됐다.
수원 화령전
수원 팔달구 신풍로 23번길 15에 위치한 화령전은 1801년(순조 원년) 정조대왕의 뜻을 받들어 화성행궁 옆에 세운 건물로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영전(影殿)이다.

화성에서 ‘화’자와『시경』의 ‘돌아가 부모에게 문안하리라[歸寧父母]’라는 구절에서 ‘령’자를 따서 이름붙인 것이다.
화령전은 정조대왕의 뜻을 받들어 검소하면서도 품격있게 만든 조선시대의 대표적 영전이다.
수원 화성행궁

화성행궁은 임금님의 행차 시 거처하던 임시 궁궐로 모두 576칸이나 되는 국내 최대의 규모로서 아름다움과 웅장함이 깃들어 있다.
1789년 읍치이전으로 팔달산 아래 건립됐고 정조대왕은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정조 24) 1월까지 11년간 13차례에 걸친 원행을 거행했으며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렀다.
1795년에는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을 여는 등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유수부 유수가 집무하는 관청으로도 활용됐다.
그러나 일제시기 이후 갖가지 용도의 건물로 이용되면서 그 모습을 잃게 됐다. 화성축성 200주년인 1996년부터 복원 공사를 시작해 2003년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kasa59@ilyoseoul.co.kr
<사진제공=수원시청>
수도권 강의석 기자 kasa59@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