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영화 ‘왕의 남자’로 흥행 감독 대열에 올라선 이준익(48). 그가 ‘왕의 남자’ 이후 6개월만에 차기작 ‘라디오 스타’를 내놓았는데, 이번 영화 역시 흥행조짐이 심상치 않다. ‘한물간 록가수와 20년지기 매니저 이야기’라는 간단한 시나리오를 접하고는 별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사람들. 그러나 영화 시사회가 끝난 이후 극장안 사람들은 영화의 감동에 젖어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이준익 감독은 이에 대해 “보잘것없는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울고 웃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들의 설움이 많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왕의 남자’의 흥행 기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한편의 감동적이고 울림이 큰 영화를 만들어낸 이준익 감독을 지난 26일 그의 사무실에서 만나봤다.
충무로에 자리 잡은 이준익 감독의 영화사 ‘씨네월드’. 낡고 오래된 사무실 벽면에 라디오스타와 왕의 남자, 황산벌 등 그동안 그곳에서 제작했던 영화의 포스터들이 걸려있다.
세평 남짓한 이 감독의 개인 사무실 안에는 정돈되지 않은 듯 정신없이 쌓아놓은 서류들과 테이블 위에 놓인 영화잡지와 기자 명함들이 놓여있었다. 그동안 인터뷰 했던 매체의 흔적들이다. 이 감독은 영화 시사회후 언론의 뜨거운 반응 때문에 하루에 5~10여건의 인터뷰를 소화하고 있었다.
“나를 보는 시선이 바뀌었다”
바로 직전까지 다른 매체와 인터뷰를 가졌던 이 감독은 “요즘 인터뷰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고, 녹초가 됐다”면서도 영화에 대한 반응이 좋아서인지 힘든 기색보다 즐겁고 행복한 기색이 역력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영화 ‘왕의 남자’가 1,230만명이라는 관객을 동원하고 흥행영화로 자리잡으면서 이 감독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당신의 성공에 반대합니다’라는 카피를 앞세운 ‘굿모닝 신한 증권’의 광고 모델로 발탁되기도 했고, 각종 매스컴에 흥행 감독의 인터뷰가 끊임없이 쏟아졌다. 비교적 저렴한 제작비와 스타배우 없이 우리의 전통을 자랑할 수 있는 사극에서 흥행을 거둔 것에 대해 관객들은 아낌없이 높은 점수를 줬다. 영화의 성공으로 이 감독은 그동안 영화를 제작하면서 쌓아온 거액의 빚을 단숨에 탕감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 감독의 이런 ‘부와 명성’은 일부 사람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또 일부 사람들에게는 동경과 존경의 대상이 됐다. 그리고 이제 그는 단순히 흥행감독이 아니라 스타감독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감독 자신이 생각하는 왕의 남자 이후 가장 크게 바뀐 점은 무엇일까.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어요. 그전에는 좀 시원찮게 봤다가, 이제는 좀 괜찮게 보이고 뭔가 있어 보이는 거죠. 사실 나는 똑같은데 말이죠.(웃음)”
거액의 빚을 한순간에 갚은 것도 달라진 점이 아니냐고 묻자 “아~그렇지. 그게 가장 크게 달라진 거지”라며 무릎을 친다. 이어 그는 “또 이제는 식당을 가도 사람들이 알아보고, 사인을 해 달라기도 한다”면서 “재미있기도 한데, 옷 입는 것을 신경써야 하니까 그게 또 짜증난다”고 행복섞인 푸념을 늘어놓았다.
사실 빚이 있을 때는 부담이 컸다고 한다. “수십억의 빚이 있다고 생각해봐. 거의 5년 동안 외로움과 고통, 괴로움에 시달리면서 살았어. 정말 죽고 싶었지.”
‘왕의 남자’가 지난 4월에 극장에서 내린 것을 감안하면, 영화 ‘라디오 스타’는 참 빠른 시간안에 제작된 영화다. 그도 그럴것이 영화의 기획을 왕의 남자 촬영때부터 해왔기 때문.
“지난 가을이니까 딱 1년 전이네. 처음 시나리오를 보고는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제작사에서 괜찮으니까 하라고 하더군. 그래서 시작하게 된 영화지.”
작품 선택에 크게 고민을 안하는 것 같다고 물었더니 “왜 안해~고민을 하긴 하지. 짧게 해서 그렇지”라며 너털 웃음을 짓는다. “나는 선택과 포기가 빨라. 사실 오래 생각할 기운도 없고, 미련도 없어.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지.”
흥행 감독들에게는 사람들의 기대가 남다른 법이다. 이번 영화를 촬영하면서 심적 부담이 꾀나 컸을 것 같은데, 정작 이 감독은 “인생은 새옹지마”라며 “흥행부담은 되지만, 계속 성공만 하면 그것 역시 불공평한 세상 아니냐”고 반문한다.
관객수 예상은 오만한 행동
이번 영화가 어느 정도 관객이 들것 같냐는 질문에 역시 그는 “다다익선이지만, 내가 관객수를 예상한다는 것 자체가 오만하고 예의없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이미 ‘왕의 남자’ 때부터 ‘성과보다 성분’을 중요시해온 그였다.
영화의 스토리는 매우 단순하다. 한때는 인기 절정을 달렸던 한물간 록가수가 20년 동안 옆에서 지켜줬던 매니저와 지방 라디오 DJ를 하면서 진정한 행복을 알아가는 내용이다.
사실, 아무리 ‘왕의 남자’ 이준익 감독이라지만 이 빤한 내용을 갖고 어떻게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됐던 게 사실. 하지만 영화는 관객을 웃고 울리기를 반복한다.
이 감독은 “빤한 이야기를 빤하게 끌고 갔는데, 그걸 보는 사람들이 자기 감정에 휩싸여서 울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전혀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잖아. 소박하다 못해 보잘 것 없는 이야기야. 다만 그걸 보는 사람들이 그만큼 자기 설움이 많았던 거야.”
또한 영화속에는 배우들의 세세한 표정이 살아 있고, 강원도 영월의 디테일한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에 앞서 기자와 인터뷰를 가졌던 라디오스타 홍일점 최정윤 역시 “촬영할 때보다 영화를 찍고 나서 감독님이 더 대단해 보인다”면서 “언제 그렇게 영화의 디테일을 다 잡아내셨는지 모르겠다”고 혀를 내두른 바 있다.
이에 대해 이 감독은 “그런 살아있는 디테일은 카메라 감독이 잡았지 내가 아니야”라며 손사래를 친다. 또한 그는 “연기는 배우가 했고, 화면은 카메라 감독이, 시나리오는 작가가 썼고, 나는 그냥 ‘하자’라고만 했다”며 “난 정말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 계속해서 손을 내둘렀다.
“나는 모든 인간들이 불쌍해”
황산벌, 왕의 남자, 라디오스타 등 이준익 감독의 대표작들을 하나씩 뜯어보면, 하나같이 비주류, 마이너리티, 약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런 성향에 대해서도 이 감독은 “내가 약자니까 그렇다”는 답을 내놓는다.
“모든 인간은 사실 약자라고 생각해요. 나는 대통령이건, 대기업 총수, 의사, 판사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이 다 불쌍해. 그러니까 내가 표현하는 모든 영화에 약자들이 등장할 수밖에요.”
이 감독은 자신을 포함, 모든 인간이 불쌍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반 사람들은 스스로를 불쌍하게 생각하더라도, 소위 잘나가는 의사, 판사, 대통령, CEO를 불쌍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부러워하거나 선망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보통.
기자의 이러한 지적에 이 감독은 놀랍다는 듯이 “그래? 나는 남들도 나랑 똑같은 생각하고 있는 줄 알았지”라며 “그럼, 내가 제일 불쌍하다”며 웃어버린다. 하지만 이 감독의 이런 생각이 바로 영화를 보는 모든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은 부와 명예에 상관없이 각자의 위치에서 나름대로의 고민과 걱정 때문에 자기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차기작, 멜로에 도전한다
이 감독이 영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가장 보여주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거죠.”
이 감독은 “멀리 있는 사람은 아무리 동경해도 소중한 사람이 될 수 없다”면서 “사람들은 언젠가는 대단한 남자 혹은 여자가 나타날 것이라는 허황된 욕망 때문에, 가까이 있는 사람은 무시한다. 영화를 통해 곁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싶다”고 밝혔다. 이는 매우 단순한 진리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대목이다.
단순한 진리를 일찍 깨달은 것 같다고 말하자 “그냥 닥치는 대로 살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난 인생의 설계가 없거든. 그냥 오늘 같이 있는 사람한테 충실하자는 거지”라고 말했지만, 사실 이 감독 주위에는 보통 5~20년 이상을 같이 일해 온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을 정도로 주위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단순한 진리’를 몸소 실천하고 있기도 하다.
영화 ‘라디오 스타’는 시사회 후 반응도 좋고, 대부분 영화 전문가들이 이번 영화에 대한 흥행을 낙관적으로 점치고 있다. 과연 이 감독은 ‘왕의 남자’에 이어 ‘라디오 스타’까지 좋은 흐름을 타고 있는 것에 대해 ‘운’ 이라고 생각할까, ‘실력’이라고 생각할까.
이에 대해 그는 명쾌하게 “운칠기삼”이라고 말한다. “운이 70%, 실력이 30%이에요. 옛날에 나는 실패를 많이 했었나 봐. 요즘 연달아 잘되는 거 보면 말이야. 하하하. 하지만 잘 될 때가 있으면, 안 될 때도 있다는 걸 알고 있지.”
이준익 감독의 차기작은 멜로다. 여자주인공은 아직 미정이고, 남자 주인공은 ‘왕의 남자’에서부터 호흡을 맞췄던 정진영이다. 이 감독은 올 12월에 크랭크인 할 예정이어서 이제부터 또 다시 정신없을 것 같다며 인터뷰 자리를 떴다.
# 이준익 감독이 말하는 배우들의 장단점
뻔한 내용에 생명을 불어넣은 두 주인공은 바로 국민배우 안성기와 박중훈. 안성기의 연기경력은 50년, 박중훈의 연기경력은 21년이다. 또한 최정윤은 10년 경력의 배우다.
감독은 이들에 대해 “억지로 연기를 요구하기보다, 본래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일상의 모습들을 그대로 반영했다”면서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연기한 게 아니라서 현장과 일상과의 경계가 없었을 정도”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50대의 안성기, 40대의 박중훈, 30대의 최정윤, 20대의 노브레인 등 4세대가 한자리 모였고, 영화속에서나 밖에서나 모두 친구 같았다”면서 “영화의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며 배우들의 자랑을 늘어놓았다.
안성기
장점 : 너무 도덕적인 사람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나이가 계급이 되고 점점 권위적이 된다. 하지만 안성기씨는 그런 게 없다. 자기 나이의 반도 안되는 어린 친구들과도 너무 다정히 잘 지낸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 특히 나이 어린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볼 때 굉장히 멋있다.
단점 : 사람이 너무 도덕적이다 보니까 재미가 없다. 좀 나쁜 짓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웃음)
박중훈
장점 : 넘치는 에너지의 소유자다. 주체를 못할 정도로 열이 뻗치는 친구. ‘황산벌’을 찍을 때는 30대 후반이었는데, 지금은 40대 초반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노련해지고, 어른이 되어 가는 것 같다. 어떤 유혹에도 흔들이지 않고, 인생의 중심을 잡아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단점: 자신의 진심을 자꾸 주변에서 확인받으려고 한다. 진심은 확인받지 않고 주변에서 느끼는 거다. 하지만 “나의 진심을 네가 정확하게 아냐”고 계속 물어보고, 자신의 태도가 상대방한테 오해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한다.
노브레인
장점 : 이들의 연기는 최고였다. 이들이 없었다면, 영화는 무척 고루했을 것이다. 그들의 생활 그대로가 너무 자연스러운 연기였다.
최정윤
장점 : 10년차 배우다. 캐릭터 잡기가 무척 힘들었는데, 너무 잘 해줬다. 아주 만족한다.
카메오(임백천, 김장훈, 이준익)
카메오라는 말이 틀린 것 같다. 영화속 ‘최곤’은 가상의 인물이다. 여기에 가상의 가수와 DJ를 끼워넣으면, 영화의 리얼리티가 너무 없어진다. 임백천과 김장훈은 실명 그대로 실제 가수와 DJ를 하고 있다.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한 연기이기 때문에 이들을 카메오 연기라고 말할 수 없다.
내가 나오는 부분은 원래 실제 중국집 주방장이 하기로 되어 있었던 장면이다. 하지만 촬영날 중국집 주방장이 안나와서 내가 대신 했다. 사실 민망해서 스크린은 쳐다보지도 못한다. 하지만 뭐든지 안해 본 거 해보는 것은 좋은 거다. 재밌잖아.
<민>
# 이준익 감독의 영화 한마디!
‘예술영화’는 소수가 즐기는 영화
최근 ‘왕의 남자’는 봉준호 감독의 ‘괴물’과 김기덕 감독의 ‘시간’을 제치고, 한국을 대표하는 아카데미 출품작으로 선정됐다. 또한 ‘왕의 남자’는 지난달 영화 ‘괴물’에게 역대 흥행 1위 자리를 내주기도 했다.
이 감독은 이에 대해 “영화 ‘괴물’이 ‘왕의 남자’를 제치고 1위를 했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며 “또한 2등보다도 3등이 더 편하다”고 밝혔다.
최근 김기덕 감독의 “예술 영화가 설자리가 없다”는 발언에 대해서는 “예술 영화는 말 그대로 소수의 전유물이다. 다수가 즐기게 되면 그때부터 예술 영화가 아니다. 대중과 거리감이 있고 소수가 즐기는 영화가 예술 영화”라고 자신의 소견을 밝혔다.
이어 몇몇 대표적인 영화가 스크린을 점유하고 있어서 대중들 선택의 폭을 제한한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자본주의의 논리에 의해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려고 하듯,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밝혔다.
<민>
김민주 kimmj@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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