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진리, 위대한 조국, 청순한 사랑으로
[일요서울 | 박찬호 기자] 한국장학재단은 2009년 설립돼 나라에서 위탁한 재원, 자본시장에서 직접 채권을 발행해 조달한 재원, 기업이나 독지가로부터 기부 받은 재원 등 다양한 재원을 운용해 누구나 우리나라의 소중한 인재가 되도록 돕고 있는 조직이다. 저소득층과 우수한 학생을 위한 다양한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으며, 저금리의 학자금 대출을 통해 가계 부담을 낮추고 대학생들이 꿈을 이뤄갈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2012년부터 시행된 국가장학금 제도를 꾸준히 확대해 연간 약 4조 원의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학자금대출 금리도 2.7%로 낮추어 실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약 160만 명의 대학생 및 대학원생들이 학자금 마련 부담을 덜게 되었다. 특히, 2015년에는 3조9억 원 가량의 장학금으로 ‘소득 연계형 반값등록금’을 완성시키며, 8분위까지 확대된 든든학자금대출로 학비 부담을 줄이고 있다.
인간경영, 초효율경영, 윤리경영, 감동경영에 앞장서서 실천하고 있는 한국장학재단의 곽병선(73)이사장을 만나 그의 좌절하지 않는 삶과 한국장학재단의 현황과 비전에 대해 들어봤다.
-최근 근황에 대해 말씀해주시죠.
▲ 한국장학재단이 지난 11월18일 서울에서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로 125로 청사를 이전하고 개소식을 가졌습니다. 정부의 공공기관 이전 정책에 따라 이전을 완료하였고, 지역 대학과 함께 고등교육을 주도하고, 지역인재채용,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예정입니다.
- 이사장님이 교육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 동기는.
▲ 제 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1920년대 만주 용정으로 이주하셨고, 2남 2녀를 두셨습니다. 맏아들이었던 큰아버지(곽양근씨)는 무장 독립군(대장은 박동건으로 알려졌음) 연락책 으로 일본군을 피해 다니던 중, 밀고를 받아 스무 살 때 일본군에 잡혀 행방불명됐습니다. 그 충격으로 할머니는 한 달 후 돌아가셨고요. 둘째 아들이었던 아버지는 당시 일곱 살 이었습니다. 한 집안이 완전히 무너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이후 용정을 떠나 만주 지역 깊숙이 무단장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저는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보통학교를 마치고 사범학교에 진학하려고 했지만 이미 연로한 할아버지를 대신해 가계를 책임지느라 학업을 포기하고 가정을 꾸렸습니다.
교육자의 길을 택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습니다. 아버지가 못 이룬 꿈을 대신 이뤄드리고 싶었죠. 제가 소학교 6학년이 될 때는 교육을 위해 이사를 결정할 정도로 교육의 중요성을 아는 분들이셨습니다.
- 남쪽행을 선택한 배경은.
▲ 저는 1942년 태어났는데 1945년 일제 패망직전 아버지가 일본군에 징집됐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아버지가 돌아왔지만 당시 만주는 마오쩌둥의 팔로군의 지배하에 들어가 공산주의 체제가 어떤 것인지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인들이 조선족에 대하는 싸늘한 태도도 걱정되어, 저의 가족은 결국 신앙의 자유를 찾아 급거 귀국 행을 택했습니다.
해방직후 사회 전반이 불안했던 상황에서 전 재산이라 해야 얼마간의 전답과 가축 몇 마리인데 이를 회수할 수 없어, 결국 어르신들은 빈손으로 귀국길에 오르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뜻이 맞는 가정 몇 식구가 귀국 행을 준비하여 1946년 1월 무단장을 떠난 지 한 달 걸려 신의주에 도달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신의주는 1945년 11월 23일 발발한 신의주 학생의거 여파로 경계가 삼엄하여, 신의주에서는 바로 이동했어야 했던 것 같습니다. 신의주에서 어머니는 조부모님과 외삼촌들이 있는 친정집을 들렀다가 남행하고 싶으셨으나, 쉬지 않고 이동하는 다른 일행들이 그렇게 되면 헤어진 후 일행들과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에 친정 방문을 접으셔야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10년 전 작고하신 어머니는 평생 이산가족의 한을 품고 사셨습니다.
어르신들은 ‘천둥산 박달재’로 알려진 충북 충주시와 제천 사이에 있는 산척면 석천리 석문동에 자리 잡으셨습니다. 얼마나 외지였느냐 하면 6㎞를 걸어야 신작로를 만나는 곳이었죠.
초등학교 6학년이 되자 큰고모가 살던 충북 증평으로 이주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청주사범학교까지 마치고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습니다. 1년간 근무한 후 3년간 군 생활을 마친 다음 서울대 교육학과에 진학했고 졸업 직후 교육분야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교육개발원에 들어갔습니다. 이곳에서 30년 동안 연구 활동을 했습니다.
- 이사장님의 신앙에 대해 말씀해주시죠
▲ 석문동에서 교회에 다니는 유일한 가정이었죠. 6km 거리에 백운교회(당시 원서교회)에 부모님이 출석하셨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은 우리 가정에 절체절명의 위기를 가져왔습니다. 공산군이 마을에도 들어와 주민들의 생활을 통제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결정적인 위기는 어머니에게 여맹위원장을 맡으라는 지시를 받게 된 것입니다.
당시 나는 어려서 그것이 우리 가족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잘 몰랐으나,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할아버지, 부모님에겐 최대의 시련이셨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지시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할아버지, 아버지와 상의하신 후에 그것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아마도 당시 어르신들의 마음은 이런 것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우리가 해방 후 귀국해서 여기에 정착한 것은 신앙을 지키자고 한 것인데, 이제 외나무다리에서 원수를 만난 것이나 다름없게 됐다. 저들의 요구를 들어 신앙을 굽히느냐 아니면 어떠한 어려움을 무릅쓰고라도 신앙을 지키느냐의 갈림길에서 신앙을 버릴 수 없다.” 이것은 순교를 각오하신 것이 아니면 선택할 수 있는 결정이 아닙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일이 있은 지 며칠 안 지난 9월 하순에 동네 구장이 한 밤중에 찾아와, 위급하니 온 가족이 급히 마을을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우리는 죽을 죄 지은 것 없다. 남에게 거짓말한 적 없고, 훔치거나 남을 해코지 한 것 없이 선하게 살아온 것 밖에 없는데, 어디를 살자고 간단 말인가? 살아도 여기서, 여기서 죽어도 할 수 없다.” 동네 구장은 당장 떠나가 어려우면 늦어도 다음날 저녁에는 떠나야 한다고 사정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다음날도 어르신들은 꼼짝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도 어린나이에 걱정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다음날 새벽녘 아랫마을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커지더니 ‘해방이다!’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것은 밤사이에 국군이 인민군을 몰아내고 다시 대한민국 세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맥아더 장군의 9.15 인천상륙 작전으로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어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 간증은 내가 다니는 경동교회 중우회 모임에서 했습니다.
공산군들은 당시 추석을 전후하여 반동분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 합니다.
절대 권력 앞에서 옳다고 생각하시는 신념을 포기하지 않으신 어르신들의 삶, 이것은 저의 가족이 겪은 역사적 경험이고, 신앙 면에선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 좌우명 영원한 진리, 위대한 조국, 청순한 사랑에 대해서 말씀해주시죠.
▲ 대학 다닐 때 공부하는 책 맨 앞장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영원한 진리, 위대한 조국, 청순한 사랑’. 세 가지를 좌우명처럼 적어 놓고 책도 읽고 공부도 하고 친구도 사귀고 했습니다. 나는 젊을 때 마음에 품었던 이 세 가지 좌우명이 세상을 살아오는 동안 긍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첫째, ‘영원한 진리’는 인생을 살다보면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가’의 기로에 섰을 때, 언제나 진실, 참, 옳은 편에 서야겠다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교육 연구 분야에서 평생을 보냈는데, 연구는 무엇이 참인가를 밝히는 일, 진리를 찾는 일이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삶이 의미 있다고 보았습니다.
둘째, ‘위대한 조국’은 내가 대학을 다닐 때는 우리나라가 많이 가난했습니다. 누구나 대학을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편으로는 ‘발전 논리’가 중요한 사회 운동의 논제가 되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가치’를 찾아야 한다는 이슈가 들끓었습니다.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우리나라가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했습니다. 교육 분야의 연구를 해왔기 때문에, 사람을 잘 가르치는 것이 개인의 행복뿐만 아니라 나라를 키우고 일으키는데도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청순한 사랑’은 사랑은 우리 인간의 영원한 주제입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사랑을 주제로 한 노래, 소설, 드라마, 희곡, 뮤지컬, 오페라 등 하나하나가 스토리에 울고 웃고 감동합니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이 순수한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사랑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대로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 한국장학재단에서 하신 일은.
▲ 2011년 국내 대학금 총액 14조 원 기준으로 올해 그 절반인 7조 원 중 정부가 3조9000억 원, 대학이 3조1000억 원을 각각 부담해 ‘반값 등록금’을 완성했습니다 .
재단은 국가장학금이나 학자금대출뿐 아니라 기부를 받아서 사랑드림장학금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기부문화 활성화에 대한 방안도 고민 중입니다. 재단은 막대한 학자금 재원을 정부로부터 받고 있으나, 나눔과 봉사 정신이 기본적으로 배여 있지 않으면 무의미하다고 판단합니다.
교육기부사업은 크게 두 가지 사업을 추진합니다. 기부금 사업과 일명 멘토링 사업이라고 부르는 나눔·배움 지기 봉사 사업입니다. 둘 다 기부문화 사업입니다. 멘토링 사업은 국민과 기업으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나누는 사업입니다. 나눔 봉사 사업은 사회지도급 인사들의 재능과 경험을 차세대리더들에게 나누는 교육기부 사업입니다. 재단은 기부금 사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올해부터 ‘푸른등대’라는 기부브랜드를 개발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기부자에게 세제 혜택도 돌아갑니다.
재단은 설립 이후 지금까지 총 2153억 원의 기부금을 조성했으며 여기서 발생된 이자와 수익으로 7500여 명에게 사랑드림장학금을 지원했습니다. 올해도 4000명에게 기부금을 통한 장학금을 지급합니다.
이 외에도 은행연합회의 기부금으로 2017년 첫 학기 입주를 목표로 경기 고양시 삼송지구에 수용인원 1000명 규모의 학생 기숙사를 신축하고 있습니다. 나눔·배움지기 봉사 사업은 매년 300여 명의 사회 각계 지도급 저명인사들이 전국의 3000여 명의 대학생들을 팀별로 멘토링 봉사활동을 벌이는 사업으로 우리나라 대표적 나눔 봉사 멘토링 사업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chanho227@ilyoseoul.co.kr
박찬호 기자 chanho227@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