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 ㅣ 이범희 기자] ‘1988년 서울올림픽 남자단식 챔피언’ 유남규 감독이 이끄는 에쓰오일 탁구단이 전격 해체를 결정하면서 탁구계에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국가대항전 출전의 기회조차 숨가빠졌다. 에쓰오일 선수들은 지난 23일 구단으로부터 해체 통보를 받았다.
내년 3월 이후, 선수들은 각자 살 길을 찾아야 하는 절박한 처지가 됐다. 모기업 경영 사정이 표면적 이유지만, 정유업계가 호황을 누리는 상황이라 납득하기 어렵다. 일각에선 다른 속내가 숨어있다는 게 정설처럼 퍼지고 있다.
탁구 실업팀 또 해체… ‘정유업계 최대 호황’ 인데 왜?
유남규 감독 “대기업의 무책임한 태도”…탁구인들 ‘울분’
에쓰오일 탁구단은 2010년 창립됐다. ‘탁구의 전설’이자 ‘1966년 아시안게임 금메달 1호’ 주인공인 김충용 감독을 초대감독으로 모시고 눈부신 활약을 했다. 2014년 7월부터는 ‘탁구 영웅’ 유남규 감독이 사령탑을 맡았으며 조언래, 김동현 등 국가대표 에이스들과 함께 구슬땀을 흘렸다.
올해 대통령기와 전국체전에서 준우승했다. ‘21세 신성’ 김동현 선수는 지난 8월, 국제탁구연맹(ITTF) 월드투어 불가리아오픈 남자단식, 복식, 21세 이하 단식을 휩쓸며 3관왕에 올랐다. 에쓰오일 2대 주주이자 대한탁구협회장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지원도 든든했다. 에쓰오일 탁구단 창단에도 힘을 썼으며 이후에도 조 회장의 남다른 ‘탁구사랑’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조 회장은 20년 만에 남북한 탁구 단일팀을 이룬 2011 카타르 피스앤스포츠컵 대회를 후원했으며 은퇴를 걱정하는 선수에게 손을 내밀어 운동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국가대항전에 집중한 선수가 좋은 성과를 내기도 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이후 은퇴를 고려하던 김경아 선수에게 국가를 위해 2012년 런던 올림픽까지 뛰어달라고 부탁했고, 김 선수는 2세 계획까지 잠시 뒤로 미루고 런던 올림픽에 참가해 태극 마크를 달고 국위를 선양했다.
올림픽이 끝나자 김 선수는 예정대로 은퇴를 선언했고, 조 회장은 지도자 수업을 잠시 중단하고 2세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대한항공 탁구단에 지시한 것이다.
또 현정화 감독에게는 미국 남가주 대학(USC) 영어 연수의 길을 열어줬다.
본인이 재단이사로 있는 USC 총장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한국의 유능한 스포츠 인재가 미래 지도자로 성장하는데 필요한 맞춤형 코스를 추천해달라고 요청했다는 후문이다.
한진그룹 관계자는 “조양호 회장의 탁구에 대한 애정은 그룹 산하 임직원들에게도 전해져 매년 사내 탁구대회를 개최하는 등 건전한 스포츠 문화 확산에 기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한항공이 2013년 말, 에쓰오일 지분을 매각한 직후 탁구단의 존폐와 관련,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해체 통보를 받은 유 감독과 선수들은 망연자실했다.
표면상 경영 탓
유 감독은 “회사로부터 대규모의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으며, 주요 인력을 해당 업무에 집중시키기 위해서라는 해체 이유를 통보받았다”고 했다. 경영상의 문제라는 것이다.
에쓰오일은 신규시설 건설을 위한 5조 원 규모의 프로젝트를 앞두고 있다.
지난해 2897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던 에쓰오일은 올해 흑자로 돌아섰다. 3분기까지 무려 8605억 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에쓰오일의 영업이익률은 지난해 -1.01%에서 올해 1분기 5.44%, 플러스로 돌아섰다. 2분기11.8%, 3분기 0.3%를 기록했다. ‘정유업계 4분기 영업이익률이 최고치를 경신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도 쏟아지고 있다. 역대 최고의 ‘반전’ 실적을 기대하며 휘파람을 부는 가운데, 유독 에쓰오일 탁구단에만 칼바람이 들이닥쳤다. 탁구단 운영에는 연간 10억 원가량이 소요된다.
때문에 업계는 최근 에쓰오일의 2대 주주였던 대한항공이 지분을 매각하면서, 탁구협회장인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과 관계가 멀어진 것을 근본 원인으로 분석하고 있다.
에쓰오일 측은 “선수들에게 해체 관련 내용을 통보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 확정된 것은 없다”는 입장을 내놨다.
한편 지난해 농심삼다수에 이어 에쓰오일까지 해체되면서 이제 남자탁구 실업팀은 단 3곳만 남았다.
더군다나 2016년부터 실업탁구리그를 출범할 예정이었는데 재검토가 불가피하게 됐다. 꿈나무들의 행동반경도 좁아졌다.
생활체육인 관계자는 “갈수록 생활체육탁구인이 증가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탁구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때보다 높아졌는데 정말이지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며 “지금도 열심히 미래를 꿈꾸며 운동하고 있을 초·중·고 학생들이 나아갈 방향이 더욱더 좁아져만 가고 있다”며 울분을 토했다.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