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행처럼 이어온 악습 드러나
지식인 사회의 신뢰 무너지나
이번 사건이 외부로 드러나면서 대부분 ‘곪아왔던 문제가 드디어 터졌다’는 입장이 나오고 있다. 사실 표지갈이는 80년대부터 알게 모르게 지속돼왔던 ‘관행’이었다는 것이다. 교수들을 비롯한 대다수는 잘못된 관행이지만 연구 실적 등 학교에서 요구하는 기준을 맞추기 위해 이런 일이 벌어졌고, 이를 쉬쉬하는 교수사회 내 분위기 때문에 표지갈이 문제가 곪을 대로 곪았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교수는 “이런 일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게 쉽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다.
현재까지 책의 전체 제목 중 일부분만 바꾸거나 집필하지도 않은 교수를 공동저자에 넣는 등의 방식으로 표지갈이를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부 교수는 수사 과정에서 ‘출판할 때 출판사에 조언했다’거나 ‘아이디어를 냈다’는 등의 이유로 저자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간 것 같다고 말했다.
검찰 관계자는 “현재 일부 교수들이 혐의를 부인하고 있지만, 혐의를 시인하는 교수들도 있다”고 덧붙였다. 일각에서 보도된 ‘대다수의 교수들이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는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현재 관련 사건이 수사 중인 만큼, 확실한 결론이 난다고 했던 다음 달까진 수사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교수들이 표지갈이로 출판한 책을 버젓이 자신의 연구 실적에 올린 것 등이 확인돼, 혐의가 대부분 인정될 것이라 관측이 나돌고 있다.
이번 표지갈이 논란은 현재까지 연루된 교수 중 상당수가 이공계 전공 서적의 표지를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관계자는 “90% 이상이 이공계 관련 전공 서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에 대해 한 출판업계 관계자는 “이공계 전공 서적이 표지갈이(를 한다는 가정 하에)의 주 대상이다”며 그 이유에 대해 “인문계·사회계열 등 문과 계열의 경우 전공서적 외에 기타 많은 책들이 있어 전공서적이 ‘반드시 필수’는 아니지만, 이공계열은 전공서적을 써야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이공계 전공서적이 표지갈이의 주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공계열에서 상대적으로 더 가격이 나가는 전공서적이 많다”며 “표지갈이가 이공계 전공 서적에 많이 있는 것은 그만큼 비싸게 팔리는 데다, 학생들이 대부분 사야 하기 때문”이라고도 덧붙였다.
갑을 관계?
이 관계자를 비롯한 복수의 출판업계 관계자들은 일각에서 제기하는 ‘교수와 출판업계 간의 관계 의혹’과 관련해 “교수와 출판업계 간의 관계는 ‘갑을’관계”라며 “표지갈이를 하는 대가로 ‘현재의 이익’을 얻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 이유로 비용을 들었다. 같은 책을 표지만 바꾸는 경우, 기존의 책을 해체하는 비용과 새로운 표지로 다시 제본을 하는 비용이 추가로 필요하다. 표지만 바꾼다고 해도 출간 비용이 추가로 들기 때문에 표지갈이가 출판업자들에게 이익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한 관계자는 “전공서적의 원래 가격이 있다 해도, 기본적으로 해체 및 제본 비용을 추가로 부담해야 한다”며 “이뿐만이 아니라 출판사가 서점으로 책을 납품할 때도 따로 (가격을 내리는 등) 비용이 들기 때문에, 현재의 이익을 위해 표지갈이를 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더해 “현재의 이익보단 재고처리나 (교수가 추후 책을 낼 때 해당 출판사와 계약을 하는 등의) ‘미래의 이익’을 위해 표지갈이에 응했을 것이다. 교수가 갑이기 때문”이란 말을 덧붙였다.
다른 관계자의 말은 이에 신빙성을 더했다. 그는 “재고 처리를 위해 표지갈이에 가담했을 수 있다”고 말하며 “재고가 남는다는 건 (기존의 책을 쓴) 교수 입장에서도 좋지 않은데, 이를 이용해 다른 교수와 함께 표지만 바꾼 것”이라 언급했다.
일부 언론은 현재 수사 과정에서 출판사가 비인기 전공 서적의 재고를 처리하기 위해 표지갈이를 교수들에게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하지만 의정부지검 관계자는 이런 내용의 보도에 대해 “사실이 아니다”고 정정한 바 있다. 관계자는 “일부 언론 보도가 과장되거나 잘못된 면이 있다”며 “출판사 쪽에서 먼저 교수들에게 적극적으로 표지갈이를 추진한 게 아니라, 함께 표지갈이를 계획하고 벌인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부 교수들 때문에…
이번 사건으로 지식인 사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일부 교수들의 성범죄, 제자 폭행 등 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는데, 이를 두고 ‘전체 지식인 사회’에 대한 쓴소리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제자를 감금·폭행한 것도 모자라 인분을 강제로 먹인 교수가 대중의 공분을 사며 사회적 파장을 만든 바 있다. 26일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은 인분교수에게 검찰이 구형한 10년보다 2년 더 많은 징역 12년을 선고하기도 했다.
특히 표지갈이 과정 중 일부 교수가 표지만 바꾼 자신의 책을 제자들에게 구매토록 해, 인세를 따로 챙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제자들의 실망감도 높아지고 있다.
현재 표지갈이 대학에 연루됐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곳은 서울 소재의 S대, 강원도 내 K대, 충북 C대 등이다. S대 학생은 소속 학교의 교수가 표지갈이에 연루된 데 대해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실망감이 너무 크다”며 “교수님들에 대한 신뢰가 (연이어 발생한 사건들 때문에) 점점 떨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사건에 연루된 대학 명단에 대해 검찰 관계자는 “수사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아직 명확히 말할 순 없다”고 말했다. 또 관행처럼 몇 십 년간 이어져 온 표지갈이 수사가 9월부터 시작된 데 대해 “한 종편이 (80년대부터 이어져 온 관행이라는 말에) 그렇게 보도를 한 것 같다”며 “(수사가 시작된 당시) 첩보를 받아 수사에 착수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수사는 다음 달 중으로 마무리될 예정이다.
김현지 기자 yon88@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