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서울 | 송승환 기자] 18년 전인 1997년 11월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굳은 표정으로 청와대 본관 1층에 마련된 단상에 섰다. 오전 10시가 되자 김 전 대통령은 차분한 목소리로 전국 TV·라디오에 생중계되는 담화문을 읽어 내려갔다. 당시 세계 11위 경제 대국이었던 한국이 외환위기를 극복하지 못해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게 됐다는 것을 알리는 대국민 특별담화였다.
김영삼 정부는 금융실명제, 공직자 재산공개 등 강력한 개혁 정책으로 경제·사회분야의 투명성을 높이는 데 일조했지만, IMF 구제금융 신청으로 외환위기를 초래한 정부라는 ‘꼬리표’가 항상 따라붙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22일 오전 0시 22분께 영면했다.
IMF 구제금융 신청 발표한 그날 ‘영면’
날짜가 바뀐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감은 그의 서거일은 공교롭게도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고 발표한 ‘통한’(痛恨)의 그날과 겹치게 됐다. 당시 특별담화를 통해 김 전 대통령은 외환위기가 초래된 데 대해 사과와 유감의 뜻을 표명하고 IMF 구제금융 신청이 불가피함을 설명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30여 년간 이룩해온 경제 발전으로 세계가 부러워하던 우리 경제가 왜 이렇게 되었느냐는 질책도 큰 것으로 알고 있다”며 말문을 뗐다.
이어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국민 여러분에게 참으로 송구스러울 뿐”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경제 환경이 변하고 과거의 경제 운용방식에 한계가 드러났음에도 이해 당사자의 반발을 의식해 보다 과감한 개혁에 주저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경제를 회생시킬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구조조정의 고통이 최소화되도록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겠다”며 “시급한 외환 확보를 위해 IMF의 자금지원 체제를 활용하겠다”고 경제난 극복을 위한 정부 대책을 설명했다.
각 경제주체에는 “뼈를 깎는 아픔이 따르게 마련”이라면서 고통을 분담해 달라고 호소했다.
IMF 구제금융 신청을 공식적으로 밝힌 김 전 대통령의 담화 내용은 해외 언론매체에서도 주요 뉴스로 하루 종일 보도됐다.
경제분야에서 공과(功過)를 뚜렷히 남긴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 재임기간 지역 발전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김 전 대통령은 우선 부산의 대표적 해상교량이자 관광자원인 광안대교 건설에도 크게 힘을 실어줬다. 재임 초기인 1994년 시작한 광안대교 건설사업이 원활하게 추진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부산과 거제를 잇는 길이 8.2㎞인 거가대교도 김 전 대통령이 두 지역에 준 선물로 꼽힌다. 1994년 12월 정부가 부산∼거제 연륙교 건설계획을 제시한 뒤 1995년 당시 재정경제원이 거가대교 건설사업을 민자유치 대상사업으로 선정했다. 2004년 12월 첫 삽을 뜬 뒤 6년간 투입된 사업비만 무려 2조6천344억원(민자구간 2조2천235억원, 연결도로 3천999억원)에 달한다.
거가대교 개통으로 부산에서 거제까지 거리가 140㎞에서 60㎞로, 통행시간도 2시간10분에서 50분으로 단축됐다. 이에 따라 물류비용이 크게 줄었고, 남해안 관광벨트 활성화 등 부산·경남 지역경제 발전에 기폭제가 됐다. 그는 5·18 민주화운동 기념사업도 적극 추진했다.
1993년 5월 13일 대국민 특별담화에서 “오늘의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 있는 민주정부”라며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 제정, 민주묘지 조성, 상무대 터 무상양여, 전남도청 이전 및 기념공원 조성 계획 등을 발표했다. 1994년 11월 묘역 조성 공사를 착공해 4년 만인 1997년 5월 13일 신묘역(현 국립 5·18 민주묘지)을 완공했다.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에 있는 국립 3·15 민주묘지도 1994년 3·15 성역공원 조성사업의 하나로 추진했다. 3·15 성역공원은 1998년부터 2003년까지 공사를 거쳤고, 2002년 국립 3·15묘지로 승격됐다.
김 전 대통령은 또 임기 초인 1993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철거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옛 중앙청 건물의 철거를 지시했다. 민족정기를 바로 잡으려면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건물로 쓰인 중앙청을 철거해야한다고 판단했다. 철거작업은 1995년 8월 15일 중앙돔 첨탑 제거로 시작해 이듬해 말 완료했다. 대전(대전 동구 판암동∼서구 둔산동)과 광주(광주 동구 월남동∼광산구 월전동) 지하철 1호선 걸설도 1996년 김 전 대통령 재임시 결정됐다.
울산은 김 전 대통령 재임시절인 1997년 7월 15일 경남에서 독립해 광역시로 승격했고, 인천에는 중국을 잇는 첫 카페리 취항, 송도신도시 건설, 인천국제공항 건설사업 등 김 전 대통령 업적이 남아 있다.
<故 김영삼 전 대통령 (1927∼2015) 연보>
▲1927년 12월 20일 경남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 출생
▲1951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 졸업. 장택상(張澤相) 국회부의장 비서관으로 정계 입문. 손명순 여사와 결혼(슬하에 2남 3녀 둠)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경남 거제에서 만25세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이후 5,6,7,8,9,10,13,14대 등 국회의원 9선). 3선(選) 개헌에 항의해 자유당 탈당. 민주당 창당 참여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에 출마했다 낙선
▲1960년 어머니 박부련 여사 북한 고정간첩에 의해 사망.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에 출마해 당선
▲1963년 군정연장 반대집회·가두시위로 서대문형무소에 23일간 수감. 제5대 대선에서 윤보선 후보 당선을 위해 민정당 대변인 활동.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에 출마해 당선
▲1964년 민주당 창당 참여
▲1965년 민주당 원내총무 선출(최연소 원내총무)
▲1967년 신민당 창당 참여. 신민당 원내총무 선출(5년간 5선, 최다선 원내총무),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에 출마해 당선
▲1969년 박정희 대통령 3선(選)개헌 반대투쟁 주도하다 초산테러 당함
▲1970년 40대 기수론 제창. 제7대 대선 신민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 출마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에 출마해 당선
▲1972년 유신 선포에 미국에서 급거 귀국해 가택연금 당함. 반유신투쟁 전개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에 출마해 당선.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해 대정부질문에서 박정희정부 테러행위 규탄
▲1974년 신민당 총재 선출(만45세 최연소 야당총재)
▲1975년 박정희 대통령과 여야 영수회담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에 출마해 당선
▲1979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총재로 재선출. YH 여공 신민당사 농성 때 경찰에 강제 연행. 법원 결정에 의해 신민당 총재 직무집행 정지. 국회의원직 제명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3년간 불법 가택연금 시작
▲1981년 민주산악회 발족
▲1983년 민주화 요구 단식투쟁(23일간)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발족. 민주협 공동의장에 추대
▲1985년 신한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추대. 민족문제연구소 설립
▲1986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1천만 서명운동 전개
▲1987년 신한민주당 탈당 후 통일민주당 창당. 6월 민주시민항쟁 주도. 통일민주당 총재. 제13대 대통령선거 출마(2위로 낙선)
▲1988년 통일민주당 총재.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에 출마해 당선
▲1989년 한국 정치인 최초로 소련 방문
▲1990년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3당 합당 선언.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추대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 전국구로 출마해 당선. 민주자유당 총재. 민주자유당 대통령후보 선출. 국회의원직 사퇴로 38년간 의정활동 마감.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
▲1993년 제14대 대통령 취임
▲1993년 해리먼 민주주의상 수상
▲1995년 신한국당 총재
▲1995년 유엔협회 세계민주주의상 수상
▲1998년 대통령 퇴임
▲2003년 유석 조병옥 박사 기념사업회 명예회장
▲2004년 북한민주화동맹 명예위원장
▲2006년 원광대학교에서 명예 정치학박사 받음
▲2008년 한국티볼협회 총재
▲2011년 범국민안보공감캠페인 명예위원장
▲2011년 제3회 대한민국 법률대상 입법부문 수상
▲2015년 11월 22일 서거
송승환 기자 songwin@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