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서울 | 홍준철 기자] ‘거산’(巨山) 김영삼 전 대통령이 11월 22일 새벽에 세상을 떠나면서 ‘후광’(後廣)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한국 현대정치사를 이끌어왔던 양김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두 전 대통령은 87년 대선전까지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서 동지였고 사적으로 막역한 친구였다. 하지만 민정당 노태후 후보에 맞서 ‘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이후 정치적으로 영원한 맞수로 살았다. YS는 DJ 서거직전인 지난 2009년 8월 병상에 있던 DJ를 찾은 자리에서 ‘화해’를 선언했지만 이미 DJ는 의식이 없던 상황으로 ‘반쪽짜리 화해’가 됐다. YS와DJ, 두 사람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한국 현대사의 큰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굴곡진 두 사람의 드라마틱한 정치역정을 재조명했다.
- 9선 최연소의원 스타형 VS 7선 자수성가형 대통령들
한 살 터울인 두 사람의 40년 정치인생은 출발점은 너무나도 달랐다. DJ는 1926년 전남 신안의 외딴섬 하의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고교졸업뒤 바로 정계에 입문했다.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정치인으로 일생 낙선의 고배를 마신 경험만 수차례였다. 반면 YS는 1927년 경남 거제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1951년 장택상 당시 총리의 비서로 정계에 뛰어들었다. 1954년 27세의 나이로 최연소 민의원(현 국회의원)이 됐고 이 기록은 61년이 지난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7선의 국회의원을 지낸 DJ와 달리 YS는 1992년까지 모두 아홉 번의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한살 터울 40년 정치인생
질곡의 세월
두 인사는 박정희 정권부터 전두환.노태우 군부 정권하에서 야당의 대표적 정치인으로 협력과 선의의 경쟁을 벌여왔다. YS는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군정에 협력하기를 거부하고 군정 연정 반대 시위를 주도하다 구속됐고 1971년 유신 이후 해외 망명을 선택한 DJ와는 달리 국내로 들어와 유신정권에 맞섰다. DJ는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납치돼 수장될뻔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80년대 신군부 당시에도 YS는 가택연금당하고 23일간 단식투쟁을 벌였다. DJ 역시 같은해 신군부에 체포돼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두 사람의 첫 번째 정치적 맞대결은 1968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다. 당시 유진오 총재가 DJ를 지명했지만 YS가 반발하면서 인준이 부결됐고 결국 YS가 원내총무가 됐다. 그러나 2년뒤 1970년 DJ는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승리해 복수에 성공했다. 당초 유 총재가 경선 직전 YS 지지를 선언해 승리가 예상됐다. 하지만 1차 투표에서 과반이 나오지 않아 결선투표를 진행한 결과 1차 투표에서 이철승계 표가 DJ쪽으로 돌아서면서 당선돼 대통령 후보가 됐다. YS는 이에 대해 “김대중씨의 승리는 곧 나의 승리”라며 경선 결과에 깨끗이 승복해 향후 정치활동에 커다란 자산으로 남는 계기가 됐다.
신군부하에서 경쟁적 협력관계는 1985년 두 인사가 힘을 합쳐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하면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를 바탕으로 12대 총선을 거치며 야당을 복원한 뒤 직선제 개헌 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주도했다. 그랬던 둘의 관계가 파탄난 건 1987년 대선때다. 당시 노태우의 6.29선언으로 야권은 YS와 DJ의 후보단일화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YS측은 DJ가 대통령이 되면 군부쿠데타 가능성과 지역감정 공세에 취약해 자신이 먼저 대통령을 하고 DJ가 다음에 하는 게 유리하다는 논리를 폈다. 반면 DJ는 ‘4자 필승론’ 즉 노태우는 경북, YS는 경남, JP는 충청, 자신은 호남+수도권을 등에 업고 당선될 수 있다는 주장으로 맞섰다. 결구 두 사람이 끝까지 주장을 굽힐질 않으면서 그해 10월 YS가 대선 출마를 선언하자 DJ는 통일민주당을 깨고 나서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선후보에 나서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는 데 일조했다. 단일화 실패로 군부정권 종식에 실패했을 뿐만아니라 이때부터 한국 정치의 고질병인 영호남 지역구도가 본격화됐다.
87년 단일화 실패이후
‘동지’에서 ‘적’으로
두 사람은 이후 계속 대립관계를 유지했다. YS는 1988년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통민당이 3당으로 전락하자 1990년 여당인 민자당, 그리고 JP가 이끌던 신민주공화당과 함께 3당 합당을 감행했다. 이에 DJ를 비롯한 야권에서 ‘배신자’라고 비난했고 두 사람은 사실상 정치적으로 결별했다. ‘3당 합당’에 성공한 YS는 1992년 민자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고 대선에서 DJ를 누르고 먼저 대권을 거머쥐었다. 대선에 패배한 DJ는 다음날 바로 정계은퇴선언을 하며 영국으로 떠나면서 두 사람의 기나긴 애증관계도 마침표를 찍는 듯했다.
그러나 1997년 대선을 2년 앞둔 1995년 DJ가 정계복귀 선언을 하고 새정치민주연합을 창당하면서 DJ-YS 라이벌 ‘시즌2’가 시작됐다. 1996년 총선에서 YS당에 대패했지만 이후 DJ는 집권을 위해 밖으로 YS 때리기를 본격화 했고 안으로는 JP를 껴안으며 ‘호남+충청’연대를 성사시켜 97년 대선에서 정권 교체를 이룩했다. DJ승리 배경에는 ‘이인제 후보의 독자출마’도 한몫했지만 YS측에서는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측이 제기한 ‘DJ 비자금 의혹 사건’에 대해 수사유보를 지시하면서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 간접적으로 도움을 줬다고 말하고 있다.
YS, 임종직전 찾아
‘화해 손길’ DJ는 무의식
DJ 집권후에도 두 사람의 앙금은 여전했다. YS는 집권초 한보사태로 차남 현철씨를 구속했고 사면을 차일피일 미루자 DJ를 겨냥해 ‘배신자’라고 공격하면서 관계가 더 악화됐다. 특히 DJ 노벨상 수상에 대해 YS는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그러던 두 인사의 화해 분위기는 DJ 서거 직전 YS가 병문을 간후 기자들과 만난자리에서 ”이제 화해한 것으로 봐도 좋다. 그럴 때가 됐다“고 밝혔지만 DJ는 이미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DJ는 YS 병문한 이후 8일 뒤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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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철 기자 mariocap@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