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구]최남백 소설가
[인물탐구]최남백 소설가
  • 박찬호 기자
  • 입력 2015-11-16 10:54
  • 승인 2015.11.16 10:54
  • 호수 1124
  • 62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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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굽이마다 우리는 끼(氣)가 있었다
[일요서울 | 박찬호 기자] 그의 은근한 미소는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 하얀 종이에 흰색을 찍은 듯, 누런 종이에 황색이 배어난 듯. 무엇이든 거기에 가져다 대면 금세 같은 색깔로 번질 것 같은 넉넉하고 여유로운 웃음. 최남백 소설가의 얼굴에선 쉴 새 없이 그런 미소가 쏟아져 나온다. 유교의 최고 직위에 있었기에 ‘꼿꼿한 선비’일 거라는 지레짐작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다. 잔잔한 미소 속에 바다가 담겨 있다.

그래서일까? 세상사에 대한 그의 해답들 역시 직설적이기보다는 두루두루 이해하고, 그래서 한편 반어적이다. 가령 ‘요즘 젊은이들이 버릇이 없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지면 “그건 당연한 거다. 어른들이 그렇게 키웠기 때문이다.”는 답이 돌아오고, ‘세상이 많이 시끄러워서 고민이다.’고 물으면 “어느 시대인들 시끄럽지 않은 시대가 있는가.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미래가 밝은 것이다.”며 환한 미래관을 들려준다. 말세는 다시 시작이라는 말과 닿아 있다. 최남백 소설가(82)가 최근 신작 ‘기(氣)’<문예바다>를 냈다. 1,2권 두 권으로 원고지로 2500매 분량의 장편소설이다.

소설은 1944년의 식민지 끝자락부터 이듬해 광복 그리고 6.25한국전쟁, 4.19학생혁명, 5.16군사 쿠데타의 역사적 현장 속에서 주인공들의 삶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지난 11월 11일 최남백 작가를 만났다.

 

최남백 소설가는 경남 합천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5세 때부터 서당에서 천자문과 사서삼경을 읽은 마지막 ‘서당 세대’다. 서당 시절 글을 외우는 능력이 비상해 남들이 서너 줄 외울 때 20~30줄을 외워 천재로 불렸다고 한다.

성균관대 동양철학과에 다닐 때 소설을 쓰기 시작해 경향신문·동아일보·현대문학 등의 작품 공모에 잇달아 당선되며 ‘최남백’이라는 필명을 날렸다. 필명의 뜻은 南白(남백)으로 雩南(우남) 이승만 전 대통령과 白凡(백범) 김구 선생 아호를 이어받고 있다.

-소설 <氣>를 쓰게 된 동기는.
▲ 자전적 소설로 제가 12살 때인 1944년 이후 우리의 현대사를 중심으로 주인공들은 해방을 맞이할 때의 어떤 몸가짐 했는지 6.25 한국전쟁 당시 공산군의 서울점령, 낙동강 전투 때의 탄약 짐을 지고 따라간 이야기, 미군 폭격기의 폭격이 직접 보고 경험한 이야기를 두 권의 소설로 담았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고비마다 새로운 힘, 기운이 발동하고 끼가 용솟음치는 것으로 보고 소설의 제목도 ‘기(氣)’라고 했습니다.

- 월간 한국소설에 연재하신 걸로 알고 있다. 당시의 반응은.
▲ 여러 군데서 전화가 왔습니다. 주로 제 나이 또래의 독자들이 공감하는 것 같습니다. “재미있게 읽었다” “감동적이었다” “단행본으로 언제 나오나”등의 반응이었습니다.

- 언제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나.
▲ 13살인가 14살인가 처음에는 서당에서 시를 먼저 쓰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황혼 병 인가 감수성이 민감할 나이니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중에 보니 문학을 하라는 병이었습니다. 또 광복 전후 이데올로기로 인간 비극적 상황을 다룬 황순원 선생의 ‘카인의 후예’라는 소설을 읽고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중3 때 학생계라는 잡지에 소설을 투고하기도 했습니다. 59년에 <어느 자세>라는 단편소설로 동리선생의 추천으로 현대 문학으로 등단 후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 좋아하는 작가와 준비하고 있는 소설은.
▲ 오 헨리 단편들과 이광수 소설을 좋아합니다. 쓰고 있는 소설은 <황제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조선의 27대 왕인 순종의 4년간에 걸친 파란만장한 이야기와 ‘기(氣)’ 소설 후속이야기를 일부 썼고 준비 중에 있습니다.

최남백 작가는 문학청년 시절 소설가 김훈씨의 부친인 김광주 선생을 스승으로 모셨고, ‘신동아’에 조선 후기 농민반란 지도자를 다룬 소설 ‘홍총각’을 7년 동안 연재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신태양’ ‘명랑’ 등 잡지 기자로 일하면서 영화배우 김지미를 비롯한 연예인과 조병옥, 김도연, 민관식 등 당대 거물 정치인들을 인터뷰했다. 가야금 명창 황병기 선생과 ‘문조사’라는 출판사를 차려 운영하기도 했다.

최남백 소설가는 다시 유학의 세계로 돌아온 것은 40대 후반. 빼어난 한문 실력 덕분에 당시 막 문을 연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고전번역연구실로 불려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수실장, 고전연구실장 등으로 5년여 동안 일하다 50대 중반에 성대 동양철학과 부교수로 발탁됐다.

‘유교의 현대화’를 주제로 거침없이 달변을 토하는 그의 강의는 인기 만점이었고 ‘유교개혁’은 그가 지금도 주창하고 있는 화두다.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정좌(靜坐)수행을 하고 ‘사서오경’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그는 “현대화 정보화 과학화 세계화 시대에 걸맞게 유교도 변해야 하며 유림의 의식구조부터 바꿔야 한다”고 역설한다. 매일 30매에서 50매 정도 소설을 집필하고 있다.

또한 정치이념으로 변질된 조선 시대 유교에서 벗어나 인의(仁義)와 도덕을 중시하는 공자·맹자 시대의 유교로 원칙으로 제시하면서 쇠락해가는 유교정신을 되살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최남백 소설가는 인생과 학문 세계와 문학은 학자로서의 삶은 초지일관이다. 한문 서당에서 한학을 익히고 정규 학교 교육을 거쳐 이 시대 최고의 소설가로 유학자로 굳건히 외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최남백 소설가의 문학과 유학은 경남 합천 산골 서당에서 출발하여 진주농고, 성대 동양철학과, 성대 대학원 국문학 석사로부터 강단에 서기 시작하여 유학대학장, 유학대학원장, 유교학회 회장 성균관 관장의 코스로 외곬 전공학문의 길을 걸었다.

또 자신이 헌정 중단을 강력 비판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고전연구실장도 지내고 주역학회, 한국예학회, 고문서학회 등에도 참여하고 율곡학회 회장도 역임했다.

매우 화려하고 폭넓은 분야에서 활동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상 따지고 보면 태생적으로 문학과 학문 세계인 유학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었다. 지금은 성대 교수직을 정년으로 퇴임하고 소설 쓰는 일에 매달려 있다.
chanho227@ilyoseoul.co.kr 

박찬호 기자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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