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행보 뒤 가려진 그림, 남한 깜짝 놀랄 일 터진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김 위원장은 지난 8월 24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6자회담 재개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하고 경제협력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을 교환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크렘린궁은 이날 정상회담에 앞서 “양국 정상회담에서는 한반도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6자회담 조기 재개 문제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라고 말했다. 두 정상은 2530만 달러 규모의 북·러 교역 문제, 그리고 남북한과 러시아 3국의 경제 협력 문제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이같은 행보에 대해 외교가에서는 여러 전망과 추측들이 나오고 있다.
정부 당국은 러시아의 울란우데에서 열린 북한과 러시아의 정상회담을 다각도에서 분석중이다. 김 위원장의 방러는 한반도 정세흐름과 동북아 경제협력 구도 전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상된다.
양국 정상의 합의내용에 따라 북핵 6자회담 재개 흐름도 결정될 것으로 전망된다. 남한을 비롯한 미국 중국 등은 북·러 정상회담이 어떤 결과를 도출해낼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북·러 정상회담에서 가장 큰 주제는 북·러 간 경제협력인 것으로 알려졌다. 남-북-러 가스관 연결과 시베리아횡단철도(TSR) 및 한반도종단철도(TKR) 연결 등 대규모 경협프로젝트의 성사 여부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우리 정부는 과거 푸틴과 김 위원장이 가진 북·러 정상회담에서 경제협력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는 점 등에 비춰 이번 정상회담도 논의 수준에서 그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이번 김 위원장의 방러에서 논의된 사안들은 대부분 이미 거론됐던 것이라는 게 외교가의 분석이다. 북·러 경제협력은 여러 가지 난제를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3국 간 복잡한 이해조정과 비용부담, 기술적 문제 등이 가장 큰 장애물이다.
북·러 경협 이번엔 다르다?
10년 전 북·러 경협을 둘러싼 가장 큰 화두는 대륙간횡단철도 건설과 북한의 노후된 설비 교체였다. 당시 북한은 남한에 경제지원을 요구했다. 러시아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남한에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노태우 정부 시절 경제위기에 처한 러시아는 남한으로부터 막대한 돈을 지원받았다. 군사무기로 차관 일부를 변제해오던 러시아는 우리 측에 “북한의 노후된 철도를 비롯해 각종 시설물을 교체해 줄 테니 러시아의 차관을 그 비용으로 대신하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북한의 노후시설은 대부분 러시아에서 수입한 것이기 때문에 러시아가 모든 노후시설을 새것으로 교체하는 것이 여러 면에서 합리적이라는 게 러시아의 주장이었다. 당시 북한은 러시아 지원과는 별도로 남측이 북한을 지원해 달라고 요구했다. 러시아의 대북 지원은 북-러 간에 풀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러시아의 물자교체 지원을 남한의 지원으로 보기에는 모호하다는 것이었다. 또 북한은 달러와 같은 현물을 더 원하고 있었다.
이 문제를 놓고 정치권에서는 찬반양론이 팽팽히 맞섰다. 남한-러시아-북한은 의견 차를 좁히지 못해 이 문제는 결국 흐지부지 없던 일로 마무리됐다.
외교가에서 남한이 빠진 상태에서는 북한과 러시아가 실질적 논의를 진행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는 이유가 여기 있다. 러시아는 북한을 통해 실질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북한이 전보다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지금은 더 그렇다. 따라서 외교가 주변에서는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실질적인 프로젝트 교환이 아니라 원칙적인 경협 합의가 전부일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또 북·러 간 경협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북핵 논의가 선행돼야 하지만 아직 그 논의가 마무리 되지 않은 상태에서 경협이 추진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같은 행보 다른 분위기
그러나 또 다른 일각에서는 “이번엔 전과 다르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김 위원장이 이번 정상회담에서 북한 경유 가스관 건설 프로젝트에 관심을 표명하고 이 사업의 기술적 문제들을 검토하기 위한 실질적 제안을 한 점이 눈에 띈다.
김 위원장은 가스관 건설 프로젝트를 가속화시키기 위해 가스관 건설 전문가들의 모임인 ‘3국(남·북·러)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자고 러시아 측에 제안했고 러시아는 이를 받아들였다. 가스관 사업은 중국의 모호한 입장 등 여러 문제들에 부딪혀 교착상태에 빠졌으나 이번 김 위원장의 제안으로 다시 활기를 되찾을 조짐이다.
러시아는 다음 달 초로 예정된 사할린-하바롭스크-블라디보스토크 가스관 개통을 앞두고 이 가스관을 통해 수송될 천연가스의 해외 수출망 확보에 큰 관심을 보여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특별위원회 창설이라는 결과를 도출해낸 것은 이런 맥락에서인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북·러 간의 경협은 북핵문제와 별도로 추진될 가능성도 있다”며 “우리나라도 가스관 연결에 매우 큰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각국이 특별위원회를 통해 서로 원만한 합의를 이룬다면 실현가능한 프로젝트”라고 말했다.
러시아는 북·러 경협에 대해 경제적 실리 외에도 가스관 프로젝트는 북한의 개혁·개방을 유도하고 남북한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는 촉매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러시아가 에너지를 통해 주변국들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북유럽과 동유럽 등에 가스공급을 통해 에너지 주도권을 쥐고 있다.
그러나 동북아 지역은 접경국임에도 미국과 중국에 밀려 러시아의 영향력이 거의 전무하다. 하지만 이런 가스관 프로젝트 추진을 통해 동북아 영향력 회복을 기대할 수도 있다.
김 위원장이 방러를 통해 무조건적 6자회담 복귀 의사를 밝히고 회담 과정에서 핵물질 생산 및 핵실험을 잠정중단(모라토리엄)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힌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이는 러시아의 외교적 성과로 해석될 수 있다. 북한이 러시아 정상을 만난 자리에서 핵 프로그램 포기를 거부하던 기존 태도에서 한 발짝 물러난 것은 러시아의 협력을 끌어내기 위한 북한의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미공개 이면 합의 존재하나
크렘린궁은 회담 직후 합의 사항의 일부를 공개했다. 하지만 4시간 30분 동안 이어진 두 정상이 나눈 대화중 일부만을 공개했을 뿐이고 많은 부분이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나탈리야 티마코바 러시아 대통령 공보실장은 이날 북·러 정상회담 뒤 북한이 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 회담 재개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메드베데프 대통령도 회담 뒤 기자들에게 “김 위원장과 허심탄회하고 실질적인 대화를 했다”면서 “북한이 자국을 거쳐 남한까지 이어지는 천연가스 수송관을 지지함으로써 가스관 건설에 합의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이어 “북한을 거쳐 남한으로 이어지는 가스관 건설 프로젝트를 협의하기 위한 3국(남·북·러) 특별위원회 발족에 김 위원장과 합의했다”고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덧붙였다.
가스관 건설 프로젝트가 일단 적극적으로 논의됨에 따라 사업 추진이 상당한 탄력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과 러시아는 2008년 북한 경유 가스관을 통한 천연가스 도입 양해각서를 체결했지만 이후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진전을 보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북한 경유 가스관 프로젝트가 현실화되면 북한은 가스관 경유 비용으로 연간 1억 달러 이상의 통과료를 챙기게 된다. 또 한국은 선박으로 액화천연가스(LNG)를 수입할 때보다 수송료를 3분의 1정도로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러시아도 시베리아 극동 지역 생산 가스를 안정적으로 판매할 수 있는 길이 확보된다.
또 김 위원장이 극동지역 최대 수력 발전소인 ‘부레이 발전소’를 방문하면서 정체됐던 남-북-러 전력망 연계 사업도 주목을 받고 있다.
러시아는 최근 몇 년 동안 북한을 거쳐 남한으로 이어지는 가스관 건설과 함께 같은 노선을 통과하는 송전선 구축 프로젝트를 남북한에 제안하면서 전력 공급원으로 부레이 수력 발전소를 꼽았다.
이곳에서 생산된 잉여 전력을 북한을 경유해 남한으로 이어지는 송전선을 깔아 한반도로 공급하겠다는 구상이었다.
3국을 연결하는 송전선 구축 프로젝트는 2003년부터 동북아 전력망 연계 사업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이는 남·북·러·중 등의 전력망을 서로 연결, 전력을 교환해 전기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으로 일단 러시아와 한국의 전력망을 북한을 경유해 연결하면 중국과 몽골, 일본 등으로 확장하는 기반을 갖추게 된다. 이 프로젝트 역시 남-북-러 3자 회의가 2003년 처음 열린 이후 각국에서 번갈아가며 열렸으나 북측의 미온적 반응으로 흐려졌다. 이 프로젝트는 에너지 안보의 위험이 노출되고 전력 주파수와 전압 등 각국이 서로 다른 전력계통의 기술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어 외교적 합의 도출이 쉽지 않다.
한편 북한과 러시아는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이면 합의를 했을 가능성도 있다. 러시아는 북핵 문제를 놓고 국제적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김 위원장에 별도의 식량지원 또는 군사 경제 협력 약속을 했을 수 있다.
일부에서는 북한이 미국과의 1:1 대면을 통해 핵보유 문제에 대한 합의를 도출했으며 이번 방러에서 러시아와도 핵문제에 관한 공감대를 형성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한 북한 전문가는 “남한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6자 회담의 원론적인 면만 보고 있다”며 “곧 북핵문제와 관련해 남한이 깜짝 놀랄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이 전문가는 “북한의 핵보유는 필사적인 것”이라며 “전 인민이 다 죽고 단 1명만 남아도 핵은 포기 할 수 없다는 게 북한의 입장이다. 북한은 전쟁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핵을 보유해야한다는 생각이다. 북한의 행보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그 실체가 곧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윤지환 기자] jjh@dailypot.co.kr
사진 뉴시스
윤지환 기자 jjh@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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