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비핵화 회담 배경 궁금증 증폭 “북·미 사전조율 결과물”

비핵화 회담 북·미 양자 대화 결과물 암시 정세 급변 예고
북한 전문가들 “북한의 대남 정책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
윤지환 기자 = 남·북이 비핵화 회담을 열었다. 2008년 12월 마지막 6자회담이 열린 지 2년 7개월 만이다. 6자회담이 열리지 않는 기간에 남·북이 따로 만나 비핵화 문제를 논의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어서 이번 회담의 배경에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
외교통상부의 위성락 평화교섭본부장과 북한 외무성의 리용호 부상은 지난 22일 오후 3시(현지시각)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남·북 6자회담 수석대표 자격으로 비핵화 회담을 가졌다.
23일로 예정된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 참석하기 위해 전날 발리에 도착한 북한 외무성 대표단은 “리용호 부상이 차기 6자회담 수석대표로 결정됐다”고 밝혔고, 이날 아침부터 실무 접촉에 나선 양측은 회담 성사에 합의했다.
우리 정부가 6자회담 재개의 조건으로 내건 3단계(남·북 대화→북·미 양자 대화→6자회담) 중 남·북 대화가 성사되자 일부 외교전문가들은 한반도 정세뿐 아니라 동북아 정세의 급변을 예상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남북 간 6자회담 수석대표 회동이 지난 22일 성사되면서 남북대화 결과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이번 회담은 여러 면에서 의미가 크다. 비핵화를 의제로 개최되는 남북 간 공식회담이라는 점에서 한반도 정세흐름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독자적인 대화 테이블이 아니라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이라는 다자 외교공간에서 열리는 회동이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회담의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칠 수 있다”며 변수를 주시하고 있다.
유연성이 남북 대화 물꼬
그러나 이번 회담은 6자회담의 틀 안에서 마련된 것이 아니라 남과 북이 독자적으로 핵문제를 논의하는 것이어서 의미가 크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말하자면 이번 회담은 ‘남북한 간 최초의 비핵화 회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ㆍ중을 중심으로 한 6자회담으로 대화가 교착상태에 빠진 그동안의 상황을 감안할 때 이번 회담은 매우 중요한 촉매가 될 것이라고 외교가는 분석하고 있다.
북핵문제에 있어 남북 간 대화를 통해 6자회담의 활로를 연다는 우리정부의 방침이 실질적으로 북한에 수용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또 이번 회담은 6자 내부의 공감대를 형성해온 3단계 회담 재개방안(남북 비핵화 회담→북미접촉→6자회담 재개)의 첫 단추가 풀리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있다. 이 때문에 이번 회담은 대화 결과에 앞서 그 자체가 큰 의미라는 게 우리정부의 시각이다.
그동안 남북 비핵화 회담 개최문제는 난항을 거듭해왔다. 우리 정부는 남북간 핵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3단계 접근을 통한 남북 비핵화 회담 입장을 고수해왔다. 북한의 입장은 남측과 극명하게 엇갈렸다.
북측은 핵카드를 대미협상용으로 활용하기 위해 남한을 배재한 채 북미대화를 고수해 왔다. 또 MB정부의 대북 정책에도 노골적으로 거부의사를 표시해 왔다.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도발에 대한 사과를 요구한 우리정부를 강하게 비난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북한은 우리정부와 모든 대화를 단절할 것이라고 공언해 왔다. 그랬던 북한이 갑자기 대화에 응하자 그 배경에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번 회담이 우리정부의 유연한 노력의 결실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이 지난 6월 초 남북대화 거부를 선언한 이후 천안함ㆍ연평도 문제와 비핵화 트랙을 분리해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북한이 대화단절을 선언했어도 대북채널을 계속 열어놓고 끊임없이 교섭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북측 역시 남북대화를 거부하면서도 남북 간 ‘외(외교통상부)-외(외무성) 채널’을 열어 놓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유연성을 바탕으로 양측의 대화는 계속됐고 결국 북핵 협상라인의 실세인 리용호 부상이 6자회담 수석대표로 ARF가 열리는 발리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게 정부의 분석이다.
남북 회담은 북미대화 결과물
하지만 이번 회동의 성사는 정부의 노력보다 미ㆍ중의 보이지 않는 힘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측 6자회담 수석대표인 위성락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지난 20일 저녁 일본 스기야마 신스케(彬山晉輔)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과 함께 커트 캠벨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와 만나 서로의 입장을 조율했다. 이에 리용호 부상은 주초부터 베이징에 머물며 중국 당국자들을 만나 대응방향을 숙의했다. 다음날인 22일 오전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과 양제츠 중국 외교부장이 회담을 열어 조속한 대화재개에 의견일치를 본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회담이 한·미·중·일의 합작품이라 불리는 이유는 바로 이런 까닭에서다. 남북 비핵화 회담에 6자회담국 대부분이 역할을 함에 따라 한반도 정세가 조만간 6자회담 재개국면으로 접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적지 않다.
북핵문제 3단계 회담 단계에 따르면 6자회담에 앞서 남북대화 다음은 북미회담이다. 외교 전문가들은 대북 식량지원 재개가 당장의 현안이기 때문에 북미대화도 곧 성사될 것으로 보고 있다. 북미대화가 이뤄지면 북한 김계관 외무상 제1부상 등 북한 고위급 인사가 방미하는 형식으로 북미대화가 성사될 가능성이 높다. 일부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오는 8·15 광복절을 맞아 남북관계와 관련한 새로운 메시지를 내놓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번 회동에도 불구하고 6자회담 재개에는 여러 변수가 적지 않다. 이번 회담을 바라보는 남북한 간 시각 차이가 클 뿐 아니라 또 6자회담 재개의 전제조건을 둘러싼 의견도 여전히 엇갈리고 있다.
우리측은 이번 회담을 북한의 비핵화 진정성을 확인하는 자리로 인식하고 있는 반면 북한은 북미대화를 위한 디딤돌로 인식하고 있어서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미국과 이미 물밑접촉을 통해 모종의 합의를 도출한 상태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북한이 갑자기 대화에 응한 것도 물밑접촉 합의내용을 공식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관측도 적지 않다.
이에 대북 전문가들은 “이번 대화를 통해 우리정부가 북한으로부터 주목할 만한 성과를 얻기는 힘들 것”이라며 “북한은 북미대화로 가기 위해 형식적인 절차를 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미국의 명분 쌓기에 동참하고 있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윤지환 기자] jjh@dailypot.co.kr
윤지환 기자 jjh@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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