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싱계의 비정상적 관행 비리 “악화가 양화를 구축했다”
[일요서울|장휘경 기자] 한국 펜싱은 그동안 뼈를 깎는 노력을 경주한 덕분에 런던올림픽 등의 세계대회나 아시안게임 등에서 훌륭한 성과를 냈다. 그러나 펜싱계 지도부의 전횡과 비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치욕과 오명을 뒤집어써야만 했다. 스포츠계 4대악 합동수사반의 집요한 수사에 시달리기도 했던 펜싱계가 말짱 도루묵됐다는 세간의 비난이 일고 있다.
지난해 세월호의 아픔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펜싱인들은 또 다른 안타까운 주검을 맞이해야 했다. 바로 런던 올림픽의 단체전(사브르) 금메달리스트(구본길, 오은석, 김정환)들이 소속된 국민체육진흥공단의 펜싱팀 감독 서범석(55) 씨가 심적인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고 서범석 감독은 문체부(문화체육관광부) 스포츠 4대악 합동수사반의 조사를 받던 중 지난해 7월 12일 경기도 하남시 펜싱 선수단 숙소 목욕탕에서 팔목 동맥을 끊어 자살했다.
서 감독은 공금을 횡령한 혐의로 계속 몰리자 지난 40여 년간 지켜온 펜싱인으로서의 자긍심과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5월, 문체부 4대악 합동수사센터 설립 이후 펜싱 관련 민원만 무려 50~60건이 쏟아졌다. 집행부와 반대파의 골 깊은 파벌다툼이 원인이었다. 확인 불가한 모함이 횡행했고, 서로를 헐뜯고 비방하는 투서가 폭주했다.
그 와중에 횡령 의혹을 받던 서 감독이 죽음을 선택했고 주변 펜싱인들은 억울함에 울분의 눈물을 쏟아냈다.
펜싱계 파벌싸움의 중심에 있었던 이광기 전 대한펜싱협회 상임고문은 서 감독의 싸늘한 주검을 본 이후 협회에서 사퇴했다.
한국중고펜싱연맹 회장과 펜싱대학연맹 부회장을 역임한 이 전 고문은 “국민체육 진흥공단 감독의 죽음 뒤 회의를 느꼈다. 내가 집행부에 더 있다간 다른 이사들에게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협회의 모든 직을 내려놓았다”고 말했다.
이 전 고문은 서 감독이 횡령 혐의로 문체부 스포츠 4대악 합동수사반의 조사를 받던 중 자살한 것 대해 책임을 느꼈다. 자신을 비롯한 협회 집행부의 비리 의혹에 대한 제보가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런던 올림픽의 1등 공신(금메달 2개, 은메달 1개, 동메달 3개)인 대한펜싱협회가 감사, 조사, 수사 등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문체부의 고위 관계자가 협회에 대한 조사에 무리하게 개입했다는 후문이다.
펜싱협회 집행부는 “문체부의 고위 관리가 협회에서 비리를 저질러 몰려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를 괴롭혔다. 런던 올림픽의 성공은 우리가 개혁을 한 덕분이었다”면서 억울해했다.
집행부에 따르면 펜싱협회는 오래전부터 H씨를 비롯한 임원들의 전횡과 비리로 몸살을 앓아왔다. 선수들이 국제대회에 참가하면 대회 경비의 일부가 협회의 고위 임원들에 의해 전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출전한 선수들이 식사비가 모자라 샌드위치나 빵 등으로 때우는 일도 있었다.
이 전 고문은 “국제대회에 나가면 문체부로부터 몇 억 원의 참가 경비를 지원받아 그 돈으로 선수들에게 물품비, 식비 등을 지급한다”며 “전직 협회 임원들은 이 돈을 착복하기 위해 선수들에게 제대로 된 식사조차 제공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이 전 고문을 비롯한 펜싱계 인사들은 ‘4대악 본부’에 온갖 인신공격성 투서 등 비리와 상관없는 민원까지 접수돼 ‘4대악 본부’가 본 취지와 다르게 운영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전 고문은 당시 펜싱협회 지도부에 비판적인 전직 임원들이 ‘4대악 본부’를 ‘보복의 칼’로 악용하려 했다고 회고했다.
경기지방검찰청에 의해 업무상횡령 혐의가 없는 것으로 밝혀진 서 감독에 대한 민원을 ‘4대악 본부’에 접수해 재조사하도록 한 이들이 바로 전직 임원들이었다는 것이다. 그 중 한 사람이 H씨다. H씨는 자신의 비리혐의는 감추고 다른 펜싱인들을 모함하며 개혁을 요구했던 파벌싸움의 주모자였다.
이에 이 전 고문은 “서 감독의 죽음 이후 많은 생각을 했다”며 “후배들이 마음껏 뜻을 펼칠 수 있도록 펜싱계의 부정부패와 비리 근절을 위해 문체부에 진정서를 보냈다”고 말했다.
국가대표 선수들을 시계 밀수에 이용
이 전 고문의 진정서를 보면 대한펜싱협회 임원을 지낸 H씨가 지난 10여년간 국제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을 시계 밀수에 이용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보통 국가대표 선수들은 국제대회 출전 후 귀국하게 되면 입국심사가 그다지 까다롭지 않다. H씨는 이 점을 이용, 선수들을 통해 밀수를 했다.
진정서에 따르면 H씨는 10년 재직 기간에 수십 차례 외국에 드나들며 당시 무역업을 하던 지인 J씨와 공모하여 시계를 밀수했다. 외국 시합이나 전지훈련에 참가했다가 귀국하는 펜싱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롤렉스, 까르띠에, 피아제를 비롯한 고가의 명품시계를 손목에 차게 했다가 한국 공항에 도착하면 걷어 회수하는 방법으로 수없이 밀수를 한 것이다. 이러한 수법으로 1997~1998년에는 30여 개를 밀수했다고 한다.
또한 H씨는 국가대표 선수들의 해외전지훈련과 시합에 필요한 모든 경비와 장비 구입비도 모두 수령해 개인적으로 사용했다고 이 전 고문은 진정했다.
이 전 고문만 이 같은 주장을 하는 게 아니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K씨도 지난해 5월, 비슷한 내용의 진정서를 관세청장에게 보낸 바 있다.
이 전 고문이 2014년 5월 12일 문화체육관광부에 진정서를 보낸 데 이어 K씨도 다음날인 13일 당시 관세청장이었던 백운찬 한국세무사회장에게 간절함이 담긴 진정서를 보냈다.
진정서의 대략적인 내용은 1991년부터 10여 년 동안 대한펜싱협회 임원 및 총 감독으로 재직한 바 있는 H씨가 밀수 및 공금횡령ㆍ착복 등을 했으니 처벌해달라는 탄원이었다.
K씨는 진정서를 통해 “H씨는 대한펜싱협회를 음해하고 모략하며 일부 소속팀 출신 제자 및 학교 후배들과 모의해 파벌을 형성하는 등 한국 펜싱 발전을 저해하고 있어 개탄을 금치 못하겠다”며 “그는 대표선수단의 훈련경비를 착복하고 공금횡령과 부정을 계속 저질러 협회의 임원직에서 퇴출당하기도 했다”고 토설했다.
그러면서“존경하는 관세청장님, 그를 사회악으로 구분해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있도록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탄원하며 “다시는 이러한 범죄가 재발되지 않게 함으로써 대한 펜싱협회가 한층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이러한 간곡한 탄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H씨는 얼마 전 한국실업펜싱연맹 회장으로 선임됐다.
한편 이광기 전 고문이 보낸 진정서를 보면 대한펜싱협회 임원을 지낸 C씨는 자신이 교수로 재직 중인 학교의 입학 및 취업과 관련해 학부모와 코치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한다. 이 전 고문의 둘째 아들은 펜싱선수로서 2000년~2001년경 C씨가 교수로 있는 대학에 재학 중이었다. 그때 C씨가 아들의 담당 교수라 이 전 고문은 반강제적으로 C씨에게 여러 차례 돈을 주었다. C씨가 계속 돈을 요구하자 이 전 고문은 그에게 돈을 건네주기 전 수표를 복사한 뒤 돈을 건넨 날짜와 장소 등을 따로 기록해두기까지 했다고 밝혔다.
또한 전 부산시청 펜싱 감독이었던 L씨는 선수단의 스카우트비와 포상금 그리고 운영비를 착복하는 등 비리를 일삼으며 부산시에서 수십년간 실무부회장으로 전횡을 휘두르고 있다. 전 발안중·고등학교 펜싱 감독이었던 또 다른 L씨도 재직 중 화성시청 펜싱 감독인 Y씨와 모의해 훈련비, 장비구입비, 대회참가비 등을 횡령ㆍ착복한 것으로 드러났다.
전 전남여고 펜싱 감독이자 광주시 협회 부회장인 P씨는 2015년 개최됐던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 자신이 아닌 대한펜싱협회 소속인 A씨가 광주시 대표로 선임돼 운영하자 이에 반발하며 A씨에게 해를 끼칠 듯이 위협했다. 특히 P씨는 지난 2012년에 친분이 두터운 광주의 모 야당 국회의원을 동원해 이 전 고문과 대한펜싱협회를 음해하려 했던 바 있다. 현재 광주시 협회 전무와 이사들은 P씨의 위협과 전횡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그의 지시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수많은 부정부패와 비리를 저지르며 물의를 일으켰던 펜싱계 4인방은 과거 H씨와 함께 대한펜싱협회에서 퇴출됐던 인물들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다시 협회 복귀를 꾀하며 한국 펜싱 발전을 방해하고 있다고 이 전 고문은 탄원했다.
정부 고위 관계자의 개입 주장
이 전 고문은 또 정부 고위 관계자 중 한 사람도 자신을 모함하고 있다고 진정서를 통해 주장했다. 그가 지목한 정부 고위 관계자는 이 고문을 협회에서 축출하도록 대한펜싱협회의 회장사인 SK텔레콤 측에 압력을 넣기도 했다.
진정서에 따르면, 정부 고위 관계자는 문제의 H씨를 두둔하며 다시 협회 임원으로 추천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그는 대한펜싱협회와 서울시펜싱협회서 퇴출된 H씨를 추천하며 “능력 있고 깨끗하니 만나서 대한펜싱협회 임원으로 영입하고 현재 이사들의 반은 바꾸라…(중략)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한펜싱협회를 본인이 관리단체로 지정하겠다”는 협박성 글을 협회에 보냈다.
이때 손길승(74ㆍSK텔레콤 명예회장) 전 대한펜싱협회장은 조금의 흔들림 없이 인사 청탁을 거절했다.
손 회장은 서 감독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러한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협회 스스로의 자정노력과 자구책이 뒤따라야 함을 강조했다.
그동안 각종 국제무대에서 눈부신 성적을 내며 승승장구했던 손 회장은 한국실업펜싱연맹 회장 당선자인 H씨를 승인하라는 압박에 불복하고 펜싱계를 떠나는 쪽을 택했다. H씨가 온갖 비리와 횡령을 일삼고 파벌싸움을 주도했던 인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손 회장은 H씨를 한국실업펜싱연맹 회장으로 승인하라는 외부 압박이 지속됨에 따라 지난 8월 20일 대한펜싱협회를 전격 사퇴했다. 그러자 펜싱협회는 패닉에 빠졌고 운영구도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손 회장은 1998~2004년 SK그룹 회장을 역임했던 전문 경영인으로 SK그룹을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시킨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외환위기에서 회사를 살려냈던 ‘백전노장’ 전문경영인답게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꿰뚫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 펜싱의 미래를 위한 ‘비전2020'을 만들고, 위기 극복을 위해 펜싱계를 안에서부터 개혁하기도 했다.
이 전 고문은 “손 회장은 펜싱협회에 ‘4대악 척결을 위한 자정위원회’를 설치하고, 펜싱인들의 의견을 수렴한 ‘자정결의'도 채택했다”며 “정부가 강력하게 추진해온 스포츠 4대악 척결에 적극 동참했었다”고 말했다.
펜싱협회의 개혁과 쇄신은 남겨진 숙제다. 펜싱인들은 SK의 막대한 자금 지원에 걸맞게 펜싱협회 운영에서도 혁신의 새 바람을 몰고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장휘경 기자 hwikj@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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