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ㅣ홍준철 기자]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공천방식을 두고 청와대와 갈등의 중심에 서 있는 가운데 한 지인이 ‘비박계 총결집’을 제안하는 전략문자를 보내 여권이 예의주시하고 있다. 지난 2일 노인의 날 기념식장에서 뉴스 통신사인 포커스 뉴스가 김 대표의 휴대폰 문자 내용을 공개했다. 이 문자는 김 대표가 공천을 두고 친박과의 대회전을 위해 비박 연대전선을 펼쳐야 한다는 제안을 담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새누리당 소장파 남경필, 원희룡, 정병국(이하 남원정) 3인방을 설득해 우군으로 삼아 친박과 청와대와 ‘각’을 세워야 한다고 적시돼 있다. 문자 내용이 알려지면서 친박계는 ‘발끈’했고 해당 당사자들을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당장 정치권에서는 ‘문자를 보낸 사람이 누구냐’에 높은 관심이 쏟아졌다. 여권 내에서는 문자를 보낸 인사로 YS-MB 대통령 만들기에 공을 세운 ‘영원한 책사’ 김원용 이화여대 석좌교수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 YS-MB 대통령 만들기 주역 김 교수 문자 ‘논란’
- 김현철과 광화문팀 활동… 무대와는 고향 선후배지간

3통의 문자, ‘청와대 친박’ 전면전 제안
첫 번째 문자는 “공천권을 국민에게 반납할지 아님 대통령과 일부 세력이 행사할지에 대한 초유의 민주주의 수호 투쟁이 시작된 거죠. 그리 가야 하지 않겠어요?”라고 왔다. 즉, 국민에게 공천을 돌려주는 오픈프라이머리에 대해 밀어붙이면서 민주주의 수호 투쟁을 벌여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장이다.
또 다른 문자에서는 “대표님 주말 동안 김학용 비서실장이 나서 정병국 원희룡 남경필이 각을 세우는 메시지를 발사할 수 있도록 협조 요청을 해야하는 게 어떤지요. 정두언 의원은 월요일(5일) 라디오에서 세게 칠 겁니다”라고 보냈다. 또한 이 인사는 ‘전략 문자’로 부족했는지 “대표님 편하실 때 전화 부탁드립니다”라고 문자를 남겼다.
문자 내용을 보면 새누리당내 차기 지도자로 꼽히는 남경필 경기도지사, 원희룡 제주도지사, 정병국 의원 등 비박 중진들에게 국민공천제의 정당성과 청와대와 친박 인사들의 공천개입 부당성에 대해 측면 지원을 요청하면서 오픈프라이머리를 민주주의 수호 투쟁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국민공천제를 두고 청와대와 친박과 전면전을 선포해야 하며 사실상 김 대표가 이를 위해 ‘정치생명을 걸고 투쟁해야 한다’는 행간의 의미도 읽혀진다.
문자의 내용이 공개되자 이 인사는 해당 언론사를 통해 “내가 다른 사람에게 받은 문자를 김 대표에게 응원 차 전달(포워딩)한 것”이라며 “김 대표가 전화를 주지 않아 문자를 다시 보낸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 인사가 김원용 교수라고 정치권에 알려지면서 다른 사람에게 받은 문자라기보다는 직접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문자에 언급된 원희룡 제주도지사 전 측근은 “김 교수가 해당 문자를 보냈다는 말을 들었다”며 “김 교수는 김문수 전 도지사를 도운 적이 있고 김용태 의원은 그를 정신적 사부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원 지사와 친분이 깊은지는 잘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비박계의 한 의원실에서도 김 교수로 알고 있었다. 왜 그럴까. 김 교수의 이력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김 교수가 처음으로 이름이 정치권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92년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대권 책사로 차남인 김현철 국민대 특임교수와 함께 ‘광화문팀’을 이끌면서부터다. 김 교수는 ‘광화문팀’과 관련해 자신의 문민정부 비사에서 “대선전 ‘YS 대통령 만들기’에 일조한 두 팀 있었는데 하나는 막후에서 활동하는 비선조직인 동숭동팀 그리고 한 팀은 공개적인 연구정책 모임으로 광화문팀이 있었다”며 자신이 맡은 역할이 분야별 교수들과 법조계, 언론계 등 인맥을 동원해 하나의 싱크탱크로 묶어내는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이 팀은 당시 김 교수가 주도적인 역할을 해 ‘김원용팀’이라는 별칭도 얻게 된다.
YS 당선 이후 MB 책사로 대통령 당선 공신
결국 두 팀에서 활동한 교수와 전문가들은 YS 문민정부 당시 정책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청와대와 내각에 들어갔다. 이 당시부터 김 교수는 고향 선배이자 YS계인 김 대표와도 친분을 맺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 교수는 공식적으로 문민정부 시절 입각이나 청와대에 입성하지는 못했다. 대신 대선이 끝난 이후에도 광화문팀에 남아 YS 차남과 일을 했고 여론조사를 통해 선거에 활용하는 등 차남 김 교수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데 일조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새누리당에서 활동한 김 교수는 외면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 교수는 1996년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 종로구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할 때 개인적으로 선거자문을 하면서 ‘책사’로서 명성을 재차 날리게 된다. 이런 인연으로 2002년 서울시장 선거와 2007년 경선과 대선 당시 이명박 캠프에 정식 명함을 지니지는 않고 숨겨진 책사로 핵심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이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김 교수는 대통령 인수위원장으로 한승주 고대 총장서리와 이경숙 숙대총장과 함께 경합을 벌이기도 했지만 막판 이 총장이 임명되면서 물을 먹었다. 이후에도 김 교수는 KBS 사장, 방문진 이사장 등 방송계 전문가로 관련기관 인선이 있을 때마다 하마평에 올랐지만 매번 고배를 마셨다. 김 교수가 인사에서 탈락한 배경에 이 전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전 의원과 앙금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2008년 총선직전 터진 이 전 의원의 정계은퇴를 주장한 ‘55인 선상반란’의 배후로 지목됐기 때문이다.
사단은 이 전 대통령이 당선된 다음 해인 2008년 4월 총선이었다. 친이계의 대대적인 친박계 숙청이 예고된 가운데 정두언, 정태근, 남경필 등 당내 소장파 55인은 대통령 친형인 이상득 전 의원에 대해 공천에서 배제시킬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 전 의원은 공천을 받았고 결국 살아남았다. 이와 관련 정두언 전 의원은 지난 3월 한 월간지와 인터뷰에서 “우리는 SD(이상득 전의원)는 공천에서 빠져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그런데 SD가 다시 출마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대통령을 찾아가 ‘안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고 술회했다.
이 과정에서 정 의원은 김원용 이화여대 교수와 함께 이 대통령을 찾아가 ‘이 전 부의장을 출마하지 못하도록 해달라’고 호소했고 이에 이 대통령은 “내게 다 생각이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결과는 이 전 부의장이 공천을 받았고 선상반란을 일으킨 55인에 대해서는 이 정권 출범후 권력 핵심부에는 전원 배제됐다. 김 교수가 YS-MB 대통령 만들기에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직이라고 맡은 것은 4개로 △한국방송공사 이사 △방송위원회 심의위원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대통령 직속 국가브랜드위원회 위원 등이었다.
3전2승1패 김교수 김무성 대통령 만들기는?
이처럼 두 명의 대통령을 만들면서도 정권의 핵심 권력에서 배제되고 베일에 쌓여 있던 김 교수가 재차 주목을 받게 된 것은 2012년 새누리당 경선때였다. ‘두 번의 대통령 만들기’에 성공해 정치권 책사로 알려진 김 교수는 김문수 경기지사가 대권 도전을 결심하는 최종 ‘4인방’(차명진·임해규·김용태)회의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당시 차 전 의원은 대선 캠프를 총괄했고 김 의원은 완전국민경선제 도입을 위한 협상 대리인 그리고 김 교수는 막후에서 김 의원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로 인해 김무성 대표가 김문수 보수혁신위원장을 내세워 ‘완전국민경선제’를 당론으로 채택하고 그 이론을 제공한 인사가 김 교수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노인의 날 기념식 ‘전략 문자’로 인해 김 교수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사실상 4번째 ‘대통령 만들기’에 책사로 나섰다는 관측이다.
김원용 약력
△54년생 △부산 △경남고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미국 텍사스주립대 언론학 박사 △한국방송공사 이사 △방송위원회 심의위원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대통령 직속 국가브랜드위원회 위원 △텍사스주립대 IC2연구원 펠로(현) △이화여대 일반대학원 디지털미디어학부 교수 △ CJ E&M 사외이사 겸 김앤장 미래사회연구소 소장
홍준철 기자 mariocap@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