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성 체납 6만 명…알고 보니 고소득자
[일요서울|장휘경 기자] 직장과 지역조합으로 운영하던 의료보험을 국민건강보험으로 통합한 이후 보험료 형평성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초기에는 지역가입자 소득 파악의 어려움에 따른 직장·지역가입자 간 보험료 형평성이 쟁점이었다. 그러나 지역가입자의 소득 파악률이 높아지고 지역가입자 비중이 상대적으로 줄면서 논란의 초점은 직장·지역가입자로 이원화된 부과체계에 따른 문제점으로 이동했다.
지난해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A(7)양에게 최근 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공단)이 국민건강보험료(건보료)를 부과했다. 현행 국민건강보험법에 따르면 부모 없이 미성년자로만 구성된 가구라도 소득과 재산이 있으면 국민건강보험법 시행령에서 정한 ‘지역가입자 보험료 연대 납부의무 대상자’가 되기 때문에 건보료를 내야 한다. 그러나 A양은 직업과 소득이 없어 건보료를 내는 게 불가능했다.
A양의 작은아버지는 “부모를 잃고 아이 혼자 살아남았다. 사고로 부모를 잃고 불안한 마음에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아이 앞으로 상속된 재산이 있을 테니 건강보험료를 내라는 건보공단의 태도가 황당했다”며 제도 개선을 촉구했다.
이에 따라 보건복지부(복지부)는 관련 시행령을 고쳐 부모가 없는 미성년자의 경우 재산이 있더라도 소득이 없으면 보험료를 내지 않게 하는 단서 조항을 두는 등 법을 개정했다.
하지만 건보공단의 무리한 건보료 추징 사례가 이것만이 아니어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도 불합리한 징수 관행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복지부와 건보공단에 따르면 1월 기준으로 국민건강보험 적용 인구는 지역가입자 1483만2000여 명(29.6%), 직장가입자 1481만6000여 명(29. 6%), 직장가입자의 피부양자 2044만8000여 명(40.8%)이다.
직장가입자는 근로소득을 기준으로 건보료를 산정하지만 자영업자나 일용직 근로자 등 지역가입자는 종합소득과 재산, 자동차, 가구원 수, 생활수준 등을 따져 건보료를 산정한다.
국민건강보험 지역가입자의 건보료는 지역가입자 가구 구성원 전원이 연대납부 의무를 진다. 이에 따라 부모가 건보료를 체납하면 자녀의 예금과 부동산이 압류될 수 있다.
지난해 가을 한 대기업에 취업한 김모(28) 씨는 입사를 앞두고 통장이 압류되는 바람에 입사 취소 통보를 받았다.
김 씨는 고교 때 부모가 이혼한 뒤 10여 년 동안 아버지와 떨어져 지냈음에도 아버지가 사망한 후 그동안 체납된 건보료와 연체금이 김 씨에게 부과돼 통장이 압류된 것이다. 10여 년 만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2000여만 원의 빚. 사망사실을 일찍 알았더라면 상속 포기를 했을 텐데, 오랜 기간 연락 없이 살다보니 사망 사실을 너무 늦게 알게 돼 상속 포기가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건보료는 24개월로 분할납부하기로 했으나 어렵게 합격한 회사의 입사가 취소돼 백수가 된 김 씨가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큰 액수였다.
김정숙 건강세상네트워크 상임활동가는 “건보료 체납자의 90% 이상은 생계형 체납자다. 정부와 건보공단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대신 독촉만 하고 있다. 건보료를 6회 이상 장기 체납해 건강보험급여가 제한된 사람도 많지만, 급여 제한 기간 중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을 때 발생하는 부당이득금이 부담스러워 아파도 병원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많은 생계형 체납자가 법의 사각지대에서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불합리한 건보료 책정 많아
서민들은 수년째 개선되지 않는 연체료 부과체계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공단) 콜센터를 통해 2년간(2013 ~2014) 접수된 국민건강보험료(건보료·자격 관리와 보험료 부과 및 징수 등) 관련 민원은 1억1768만8621건으로서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건보료 민원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이해하기 어려운 기준으로 건보료가 책정된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건보공단에 따르면 직장가입자인 송모(57) 씨는 물류유통업체 대표지만 월급이 거의 없는 것으로 신고해 매월 부담하는 건보료가 8380원에 불과하다. 반면 거주할 곳이 없어 폐허가 된 상가건물에서 지내는 박모(84) 씨는 선산이 있는 토지를 보유하고 있어 소득이 없음에도 건보료로 매월 3만6150원을 내야 한다.
이런 형평성 문제 때문에 건보료 부과체계를 소득 중심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얘기가 꾸준히 나왔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의 주요 국정과제 중 하나인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선’ 정책은 사실상 폐기됐다.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선'은 38년 만에 대대적으로 손질하던 사업으로, 복지부 개선기획단이 마련한 개편안이 시행된다면 보수 외에 연 2000만 원 이상의 추가 소득(임대, 이자, 배당소득 등)이 있는 직장가입자 26만3000여명은 월평균 19만5000원의 건보료를 더 내야 한다. 또 직장가입자의 피부양자로 등재돼 건보료를 내지 않았던 사람 가운데 연 2000만 원 이상의 소득이 있는 19만3000여명은 지역가입자로 전환돼 월평균 13만원의 건보료를 내야 한다. 반면, 전체 지역가입자의 80%가량(약 600만 명)은 건보료를 더 적게 내 인하 혜택을 보게 되는 수혜자가 더 많다.
김종대 전 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은 지난해 11월 14일 퇴임식에서 “현행 건보료 부과 기준의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며 현행 건보료 부과체계의 개편을 다시 촉구했다. 특히, 김 전 이사장은 자신의 퇴임 후 건보료를 실례로 들었다. 그는 앞으로 직장가입자인 아내나 자녀의 피부양자로 전환되면 연 2000만 원의 공무원연금소득과 강남의 아파트(5억4240만 원), 경북 예천의 땅(2243만 원) 등 많은 재산이 있음에도 건보료를 내지 않게 된다며, 현행 피부양자 제도의 허점을 지적했다.
현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건보료 부과체계 개선안의 ‘백지화’ 배경에는 고소득 가입자의 반발이 자리한다. 정부의 예고대로 건보료 부과체계가 소득에 따라 개편된다면 고소득자는 건보료가 오르고, 저소득자는 적게 내는 합리적인 대안이 제시되지만 논란은 거세질 전망이다. 복지부는 건보료 인상으로 불만을 표출할 고소득층을 설득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시민사회단체들은 “현행 건보료 부과체계는 지역가입자에게 과중한 부담을 지우고 고소득 직장가입자에게 유리한 역진적 제도”라며 “돌연한 개편 논의 백지화는 황당한 정책 후퇴이며 정치적 셈법에만 치우진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건강보험료를 낼 능력이 있으면서도 고의로 내지 않은 고소득 전문직 등 악성체납자가 해마다 증가해 올해 6만 명에 육박했다.
2015년 8월 현재 이들을 유형별로 살펴보면 의사·약사·변호사·연예인·프로 운동선수 등 전문직 종사자 383명, 고액·장기체납자 687명, 고액재산 보유 체납세대 3만8천923세대 등이었다.
공단은 이들에 대해 압류(부동산, 자동차, 예금통장, 카드매출대금 등), 공매 등 강도 높은 체납처분을 추진해 체납보험료를 강제 징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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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휘경 기자 hwikj@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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