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 밥 굶지 말라고 쌀 유통업체 사기 친 아버지

3명의 자녀와 아내 위해 말기암 딛고 마지막 한탕 벌여
자신의 범죄 수익금 10억 원 아내에게 넘기기 위해 이혼
[이창환 기자] = 농특산물 거래의 허점을 이용한 일행들의 범행 때문에 대형 농특산물유통업체가 피해를 당했다. 유통업계 종사자였던 권모(47)씨 등 4명은 수개월 간 공들인 끝에 범행에 성공했다. 이들은 유통업체를 상대로 57억 원을 가로챈 후 잠적했지만, 경찰의 수사에 붙잡혔다. 피해 유통업체는 45억 원을 화순군 농민에게서 지원받아 설립됐기 때문에 조기에 검거하지 못할 시 많은 농민들의 피해가 우려됐다. 범행을 계획한 권씨는 시한부 말기암 환자였다. 그는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20년 동안 쌀 유통업 등에 종사했던 권씨는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성실한 모습을 잃지 않고 살았다. 가정에 충실했고 신앙심 또한 깊어 이웃 주민들에게 평판도 좋았다.
이런 권씨에게 불행은 2006년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원인을 밝힐 수 없는 혈액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혈액암 판정 이후 권씨는 다니던 유통업체를 그만 둬야 했다.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불리는 혈액암은 구내염, 요로감염, 발열, 관절 통증, 뇌출혈, 비장비대 등의 증상이 나타나는 병이다.
더 이상 일을 해선 안되는 상황이었지만 권씨는 아르바이트를 통해서라도 수입을 이어가려 애썼다. 잦은 병원 입원으로 병원비에 대한 부담은 커졌다.
지속적인 치료로 병은 한때 정체기에 머물렀다. 하지만 완치보단 일을 택한 권씨의 결정 때문에 결국 또다시 악화됐다.
그후 지난해 초 권씨는 병원으로부터 1년을 채 넘길수 없다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이후 권씨는 다가오는 날짜 때문에 수 개월간 극심한 슬픔에 잠겨 살았다. 3명의 자녀들은 아직 미성년자였고 아내 또한 마땅한 수입원이 없어 막막하기만 했다.
돈을 마련하고 세상을 떠나야겠다는 마음에 권씨는 궁리 끝에 지난해 7~8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농특산물 거래가 ‘신용사업’이라는 점을 이용한 범행이었다.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범죄’를 위해 권씨는 아내 안모씨와 지인 선모(42)씨, 이모(39)씨를 불러들였다. 선씨와 이씨는 권씨와 10년 이상 유통업을 동업했고, 한솥밥을 먹고 지낸 적도 있었다.
돈의 공포와 죽음 때문에
그릇된 생각 품어
권씨는 만약 일이 잘못돼 경찰 수사를 받게 된다면 자신의 “단독 범행으로 보이게 만들 수 있다”, “죄는 내가 다 안고 가겠다”는 약속과 함께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농특산물유통업체 사이에서는 믿고 있는 업체가 납품을 약속하면 거액의 선급금도 미리 주는 것이 가능했다. 권씨는 2009년 설립된 ‘화순농특산물유통전문회사’를 대상업체로 점찍었다. 화순농특산물유통은 지난해 매출액이 267억 원에 달하는 유통업체 였다.
먼저 선씨는 권씨의 지시에 따라 화순농특산물유통에 접근해 신뢰를 쌓기 시작했다. 선씨는 매매 결정권을 가진 대표자들에게 권씨가 거짓으로 설립한 유통업체를 소개하면서 술 접대와 고가의 선물을 배풀었다.
선씨는 대표자들과 자리를 함께 하면서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에 벼를 납품할 수 있다. 쌀을 지원해 줄 인원을 확보했다”고 말했다. 또한 “물량확보를 위한 선급금이 필요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어느 정도 친분이 형성됐다고 믿은 선씨는 대량으로 쌀을 모으기 시작했다. 실제로 시세보다 싼 값에 쌀을 납품시켜 신뢰를 얻기 위해서였다. 권씨 등 4명 중 쌀을 빌릴 수 있는 인물은 선씨가 유일했다.
선씨는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 알고 지내던 농부, 유통업체 등으로부터 17억 원 상당의 쌀을 받아냈다. 그리고 수억 원의 손해를 감수하고 쌀을 납품했다. 쌀을 넘길 당시 시중의 시세는 40kg당 5만3000원 이었으나 이들이 제시한 금액은 4만5500원 이었다.
농민들의 자금과 맞바꾼 선물
화순농특산물유통은 선씨의 말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게 됐고 이에 선씨는 곧바로 “쌀 40kg 20만 포를 시세보다 싸게 납품해 주겠다”는 말로 결정권자들을 꼬드겼다. 그리고 권씨를 유통업체 대표자로 직접 소개 시켰다. 권씨는 최대한 정상적인 모습을 보인 채 거래를 진행했다. 거래에 성공하기까지는 8개월의 기간이 소요됐다. 의사의 판단 대로라면 권씨는 이미 사망했어야 했다.
권씨 등 4명은 화순농특산물유통으로부터 지난 3월 2일부터 5일 간 57억 원의 선급금을 전달 받았다. 이들은 이 금액을 선씨 20억 원, 권씨 10억 원으로 나누는 데 동의했다. 나머지는 투자비용을 갚는 것과, 안씨에게 지급하는데 사용했다.
권씨는 57억 원을 빠른 시간 내에 모두 꺼내기 위해 계좌 이체를 시키며 은행에 있는 현금을 긁어모았다. 현금이 여의치 않을 때는 외화를 출금 받았고 일부는 쌀과 백화점 상품권으로 바꿔 소유했다. 그리고 오피스텔을 하나 임대해 현금 등을 숨겼다.
금액을 나눈 권씨는 자신에게 혐의가 집중되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권씨는 먼저 아내와 이혼부터 실행했다. 아내에게 건넨 범죄 수익금을 몰수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자신의 주소지를 광주광역시에서 서울 관악구로 옮겼다.
권씨는 선씨 등이 가져간 금액이 추적당하지 않기 위해 수익금으로 구입한 쌀 일부를 태우거나 현금을 땅에 묻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경찰의 수사는 화순농특산물유통의 신고를 받은 지난달 25일 시작됐다. 그리고 권씨의 뜻과는 반대로 순식간에 공범 여부를 파악했다. 경찰은 권씨의 가족을 먼저 설득하면서 권씨의 자백을 유도했다.
경찰은 “범죄 수익금을 감추는 것도 범죄다. 모두 추적당해 압수당하게 되니 권씨의 자백을 도와달라”며 설득했다. 이에 가족들은 눈물로 권씨를 설득했다.
선씨 역시 처음에는 권씨와 약속한대로 모든 책임을 권씨에게 돌렸다. 하지만 경찰의 끈질긴 설득 앞에 결국 범행을 자백했다.
경찰은 이들에 대한 금융계좌와 자금 출처를 분석해 피해 금액을 회수하는 데 박차를 가했고 그 결과 화순농특산물유통은 피해금의 상당수를 회수하게 됐다.
현재 호스피스 병동에서 지내고 있는 권씨는 진통제를 맞지 못하면 고통을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이제 그는 곧 가족들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이창환 기자] hojj@dailypot.co.kr
이창환 기자 hojj@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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