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남발로 사건 폭주…범죄자 양산하는 국가로 낙인
[일요서울|장휘경 기자] 최근 들어 별것도 아닌 분쟁들로 인한 고소를 당해 범죄자로 낙인찍히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개인 간의 다툼에 수사기관이 개입하는 ‘민사의 형사화’는 처벌의 위협으로 시민들에게 불안감을 심어주고 있다. 날로 심해지는 고소에 이은 맞고소가 이제는 우리 사회에 공식 아닌 공식으로 자리잡혀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고소로 해결하려는 사회, 즉 범죄자를 양산하는 국가로 치닫고 있다.
2007년부터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서 식당을 하던 윤모씨는 2010년 장사가 어려워지면서 자금난에 빠졌다. 급하게 돈이 필요했던 윤씨는 어쩔 수 없이 대출업체에서 1000만 원을 빌렸다. 그러나 사정이 점점 열악해져 식당을 접을 수밖에 없게 돼 결국 일용직 노동자로 전업했다. 그동안 열심히 일을 해도 임금이 적어 빌린 돈과 이자를 갚지 못해 안절부절하던 윤 씨에게 검찰에서 연락이 왔다. 서울지검은 돈을 안 갚은 윤 씨가 형법 347조 사기죄에 해당한다며 기소했다.
제약회사에 다니던 정모씨는 2011년 회사에서 퇴직했다. 월수입이 1000만 원이었던 정 씨는 형편이 나빠져 2012년 대출업체에서 2000만 원을 빌렸고, 152만 원까지 갚았다. 하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아 갚지 못하자 인천지검 역시 정씨를 사기범으로 기소했다.
윤 씨와 정 씨 모두 똑같이 돈을 갚지 못했지만 식당을 하던 윤 씨는 무죄로 판결났고, 제약회사에 다니던 정 씨는 유죄로 판결났다.
무죄를 선고한 서울지법은 “차용 당시에는 변제할 의사와 능력이 있었다면 그 후에 차용금을 변제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단순한 민사상의 채무불이행에 불과하다”고 판시했다. 반면 유죄를 선고한 인천지법은 “변제능력이 없음에도 변제하겠다고 말한 행위는 기망행위에 해당하므로 유죄”라고 판결했다.
윤 씨에게 무죄가 선고됐다고 빚 1000만 원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평생 동안 독촉당하고 돈을 갚아야 한다. 반대로 김 씨에게는 유죄가 선고됐지만 대출회사가 얻는 이익은 없다. 계속해서 독촉하지 않으면 나머지 빚과 이자를 받을 수 없다.
오히려 대출회사는 민사 판결을 받아서 그 판결문을 가지고 재산을 압류해 처분하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그럴 만한 재산이 없었다. 이에 대출회사는 검사가 전화를 걸면 이들이 겁을 먹고 다른 빚을 얻어 갚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정 씨가 전과자로 낙인찍힌 것뿐이다.
‘민사의 형사화’가
의식 지배해
돈을 안 갚거나 못 갚는 것을 법률용어로 채무불이행이라고 한다. 국가가 개입되지 않으면 민사라고 한다. 하지만 채무불이행에 사기죄라는 형벌권을 동원하면 국가가 개입하게 돼 형사가 된다. 법과대학 교수들은 이를 가리켜 ‘민사의 형사화’라고 말하는데, 풀어서 말하면 개인 사이의 일에 감옥을 운영하는 국가가 끼어드는 것이다.
현재 형벌 관련법 상 우리 일상의 분쟁이 너무나 많이 범죄로 정해진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사고를 내도 범죄이고, 부동산을 팔겠다고 중도금까지 받았다가 마음이 바뀌어도 범죄다. 몇 백만 원일지라도 갚지 못하면 곧바로 범죄자가 될 수도 있다. 더욱 문제는 이런 민사의 형사화가 우리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사분쟁을 범죄로 만드는 데는 대법원도 한몫해왔다. 국회가 처벌이 가능한 범죄를 늘리는 사이 사법부도 사회를 처벌로 통제하는 데 앞장서 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부동산 계약해지 범죄’다. 사회가 계약을 지키도록 감옥을 동원하는 것이다.
지난해 경기도 이천에 사는 홍모씨는 자신이 소유한 땅 871㎡를 4억6000만 원에 팔기로 하고, 계약금 5000만 원을 받은 다음 중도금 1억 원을 받았다. 하지만 더 좋은 상대방이 생겨 다른 곳에 팔았다가 지난해 법원으로부터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부동산 계약해지 범죄는 대법원의 판례로 1986년 시작된 것인데, 법률가들도 이론을 이해하기 어렵다. 부동산 거래를 중단해 상대방이 손해를 입었다고 해도 그게 왜 처벌 대상인지 학계의 의문이 잇따른다.
통계상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형사처벌이 얼마나 더 많은지를 비교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외국에서는 범죄가 아닌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범죄로 간주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가 꾸준한 것으로 미뤄볼 때 상당한 수준인 것은 분명하다.
명예훼손, 모욕, 파업처벌, 간통, 혼인빙자간음 등이 외국에서는 보기 힘든 대표적인 범죄다. 이들 상당수는 일제강점기에 이식됐지만 일본은 법개정을 통해 없애거나 적용하지 않아 사문화됐다.
혹자는 우리나라 시민사회가 견고치 못해 분쟁의 범죄화에 관대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한 부장판사는 “서양에서도 근대 이전에는 제대로 된 민·형사 구분도 없이 국가가 나서서 모든 일을 해결했다.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분쟁을 스스로 해결하는 원칙이 생겼다. 하지만 우리는 근대를 식민지를 통해 이식 받으면서 그런 경험을 갖지 못한 것이 원인”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범죄화가 불가피한 현실이라 더욱 문제가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대기업이 내부문제에 부딪쳤을 경우 주주가 문제를 제기해서 민사소송을 거는 것이 맞다. 하지만 한국 재벌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승소할 가능성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경영상 판단에 국가가 개입하지 않는 게 옳지만 한국에서는 한계가 명백하다. 검찰이라도 나서서 배임으로 처벌하고 빼돌린 회삿돈을 찾아내지 않으면 경제질서가 잡히지 않고, 달라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또 형사절차가 가장 값싸고 신속한 분쟁 해결 수단이라는 점도 시민들의 분쟁 범죄화 지지의 원인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서양에서는 한번 재판을 시작하면 쉽게 끝나지 않는다. 검찰과 법원은 효율적인 분쟁해결 수단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변호사를 동원해 계약서를 촘촘하게 작성한다. 영국 유학 중에 집을 빌리는 데 작성한 계약서가 100쪽에 가까웠다”고 말했다. 이런 나라에서는 검찰을 동원하고 정답 없는 재판을 벌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역사적 경험과 사회 신뢰도가 다른 한국이 하루아침에 사적 분쟁의 비범죄화로 이전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양하다.
법무법인 태신 신현동 변호사는 “한국의 양형은 외국에 비해 전반적으로 상당히 높다”면서 “재판을 해본 사람들은 민사로 가면 신속하게 해결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검찰에서 처벌을 하겠다고 겁을 줘야 자백하고 끝이 난다고 믿는다. 그러다 보니 처벌이 강해지길 바라고, 무슨 일만 있으면 양형을 높이라는 주장이 쉽게 나온다”고 말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비범죄화와 함께 징벌적 손해배상(Punitive Damage) 제도 등을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영미권 제도인 징벌적 손해배상은 사적인 분쟁에서 가해자의 행위가 악의적일 경우 실제 손해액보다 훨씬 많은 손해배상을 물린다. 최근 불거진 폭스바겐 배출가스 조작과 관련해 천문학적인 손해배상 판결이 전망되는 것도 미국이 채택하고 있는 징벌적 손해배상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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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휘경 기자 hwikj@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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