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 ㅣ 이범희 기자] 재계가 또 울상이다. 검찰 수사소식이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기 때문이다. 일부 기업에선 "지친다. 차라리 먼지 하나까지 다 털어내달라"는 하소연이 이어진다.
한 대외협력팀 관계자는 "현 총수도 아닌 전임 총수에 대한 수사를 벌이고 지지부진한 수사를 이어가면서 현재 진행 중인 사업에도 큰 차질을 빚고 있다"고 말한다.
또 다른 관계자는 "MB친기업이라는 오명이 붙어있는데 오히려 MB정부 당시 사업적 이득을 본 게 없다"며 "그 주홍글씨 때문에 현정부 눈치까지 살펴야 한다"고 전했다. 그만큼 기업경기가 쉽지 않음을 시사한다.
MB 정권 때 선임·연임된 포스코·KT&G·농협 CEO ‘압박’
칼끝 ‘윗선’까지 정조준은 말뿐…흐지부지 수사에 위축
타고 온 차량에서 내린 이 전 의원은 어두운 회색 정장 차림이었고, 수행비서의 부축을 받아 겨우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모여든 취재진의 질문에 알아듣기 힘들 만큼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 후 조사를 받기 위해 건물 안으로 향했다.
출석한 이 전 의원은 저축은행으로부터 불법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돼 1년 2개월간 수감 생활을 마치고 2013년 9월 만기출소한 지 2년 1개월여 만에 다시 검찰 조사를 받게 됐다.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부장검사 조상준)는 이날 오전 10시 이 전 의원을 소환해 티엠테크 등 포스코 협력업체 3곳을 통해 30억 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한 경위를 추궁할 계획이다.
문제는 포스코 수사가 7개월째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뚜렷한 혐의를 입증하지 못한 채 수사가 이어지면서 포스코 내부도 위태롭다. 손 대는 사업마다 악영향을 받고 있다는 내부 사업단의 불만은 물론 직원 사기도 현저히 떨어졌다. 한 직원은 “연중수사설이 나돌고 있다”며 “주인없는 회사에서 수사만 받는 회사로 낙인 찍힐까 두렵다”고 전했다. 검찰의 장기간 수사로 인한 부담이 사업뿐 아니라 직원 개인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검찰은 기업 수사를 위해 검찰 특수부를 풀가동한 상태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폐지 이후 그 역할을 맡고 있는 서울중앙지검 특수 1부와 2부, 3부가 총동원됐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는 7월 말부터 석 달째 농협 비리를 수사 중이다. 리솜 리조트에 대한 농협의 특혜 대출 의혹에서 출발해서 농협 경영진의 납품 비리로 확대됐다.
특수 3부(부장검사 김석우) 역시 두 달 넘게 KT&G 임원들의 비리에 초점을 맞춰 수사하고 있다.
특히 압수수색 대상에 민영진 전 사장 집무실과 비서실을 포함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수사가 그를 정조준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민 전 사장은 2011년 소망화장품과 머젠스(현 KT&G생명과학) 등을 인수·운영하는 과정에서 수십억 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검찰은 수사 과정에서 민 전 사장이 회삿돈을 빼돌린 단서를 잡고, 수사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민 전 사장은 비자금 조성 의혹이 커지자 앞서 7월 29일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자원외교 비리 수사를 수사중인 합동수사단은 새누리당 친이(친이명박)계 성완종 전 의원이 회장으로 있는 경남기업을 압수수색하는 등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이 정도 규모의 수사라면 검찰이 그동안 청와대와의 교감 하에 오랫동안 준비해왔다는 의미”라며 “그만큼 국정 동력 확보를 위한 국면전환이 절실한 상황이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이는 공교롭게도 수사 받는 기업 다수가 MB 정권과 밀접했던 대기업과 MB 정부 시절 자원외교에 참여했던 기업들이 표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정치권에서는 이번 수사를 본격적으로 기획하기 시작한 건 지난 연말부터였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지난해 말 ‘정윤회 국정개입 문건’ 파문에 이어 올초 연말정산 사태가 터지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최저 20%대까지 떨어졌다. 국정운영이 되는 것 없는 사실상 마비상태였다.
이런 가운데 올 3월 이완구 전 총리의 ‘부패와의 전쟁’ 담화와 지난달 김현웅 법무장관의 ‘부패 척결’ 지시에 발맞춰 검찰이 풀가동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공정거래위원회도 올초부터 본격적으로 재벌기업들에 대한 일감 몰아주기 조사에 착수했다. 올해 2월 일감 몰아주기 규제가 시행된 이후 3개월 만에 칼을 빼든 공정위는 1년의 유예기간 동안 인수합병, 지분 매각 등의 꼼수로 법망을 빠져나간 대기업 계열사에게도 “면죄부는 없다”며 고강도 조사를 예고한 상태다.
‘법’ 비웃는 일감 몰아주기
공정위의 이같은 일감 몰아주기 조사는 최근 정부의 ‘부정 부패 척결’ 기조와도 무관치 않아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이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법무부장관을 총리로 지명한 배경이 부정부패를 척결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반영됐고 일감 몰아주기는 박근혜 정부 출범 초기부터 역점을 뒀던 경제민주화의 핵심 중 하나로 꼽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번 공정위의 조사가 단순히 1~2개 기업을 상대로 한 보여주기식 조사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돌았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이 역시 군불(?)만 지폈을 뿐 특별한 성과를 내놓지 못한다.
김기준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지난 6일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제출받은 ‘상위 5대 기업집단 계열사 별 내부거래 현황’ 자료를 분석한 결과 삼성·현대차·SK·LG·롯데 등 5대 그룹 계열사 310개 가운데 내부거래 비중이 50% 이상인 계열사는 112개에 달했다.
내부거래 비중이 100%인 기업도 24개나 됐다. 내부거래 비중이 100%인 계열사는 삼성이 9개로 가장 많았다. 올 2월부터 시행된 공정거래법 상 일감 몰아주기 규제는 총수 일가의 지분율이 30%가 넘는 계열사(비상장회사는 20%) 가운데 내부거래 금액이 200억 원 이상이고 내부거래 비중이 12% 이상인 기업을 대상으로 한다. 112개 계열사 중 111곳은 내부거래 비중이 매우 높지만 총수 일가 지분이 30%가 안 돼 규제 대상에서 빠졌다. 결국 1곳만 규제대상이다.
LG그룹의 지주회사인 LG의 경우 2013년 총수 일가 지분율이 31.3%로 규제 대상이었다가 2014년 지분매각으로 지분율이 29.84%로 낮아져 제외됐다. 이후 구본무 회장의 장남인 구광모 LG 상무가 친·인척들에게서 지분을 사들이면서 다시 규제 대상에 편입됐다. 올 4월 기준 LG의 총수 일가 지분율은 30.92%다. 0.92%만 처분하면 규제 대상에서 다시 빠져나갈 수 있는 셈이다.
무리한 수사 지적도
이렇다 보니 일련의 수사 진행상황을 두고 녹슨 사정기관이라는 지적이 나돈다. 검찰과 공정위 안팎에서도 “무리한 수사를 한 게 아니냐”는 비판이 이어지는 실정이다.
실제 지난 3월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한 직후 시작된 포스코 수사의 경우 비리 의혹의 핵심인물로 지목된 정동화(64) 전 포스코건설 부회장의 구속영장이 두 차례 연속 기각됐다.
수사 반전의 분수령으로 꼽현던 배성로(60) 전 동양종합건설 회장에 대한 구속영장도 법원에서 기각되면서 재계로부터 거센 반발을 사기도 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노철래 새누리당 의원은 국정감사에서 “검찰의 수사가 장기화하면서 기업 활동 위축으로 인한 피해 증가와 국민 피로감까지 더해지고 있다”며 “기업과 경제에 악영향이 없도록 부정부패에 대한 신속한 수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노 의원은 “불법행위와 부정부패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중히 처벌해야 하지만, 오직 수사 성과에만 집착해 비정상 편법적인 수사 기법을 동원해서는 국민들이 수긍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