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기자가 만난 사람들] 금병찬 우진폼테크 대표
[박찬호기자가 만난 사람들] 금병찬 우진폼테크 대표
  • 박찬호 기자
  • 입력 2015-10-05 11:23
  • 승인 2015.10.05 11:23
  • 호수 1118
  • 62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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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과 나눔 통해 지역 섬기며 봉사와 희생 되새기다

책에서 인생을 배웠고 사업의 확신 갖게 된 학구파

[일요서울 | 박찬호 기자] 누구나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 성장을 지향하고 발전을 도모한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과 미래를 위해 노력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현실과 부딪히며 살면 살수록 고통과 절망뿐이다. 이 고통과 절망위에서 이겨낸 이가 금병찬(57) 우진품테크(주)대표이다.

경북 칠곡이 금병찬대표가 태어난 고향이다. 그는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나 부친의 엄격한 가정교육 속에서 모범적인 아이로 성장했다. 부친은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재직하고 계셔서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가정교육이 더 엄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부친의 직장으로 인해 대구로 이사해야 했고, 밖에서보다는 집에서 부모님과 생활하는 것이 더 많아 늘 책과 함께해야 했다. 그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대구에서 중학교 무시험제도가 처음 도입되었다. 지금은 학군이 잘 편성되어 있고 집 가까운 학교로 배정을 받지만 그 때는 그런 준비가 안 되어서 그런지 추첨을 통하여 받은 학교는 그가 사는 곳과는 정반대에 위치한 대구의 동쪽 끝이었다.

교육자 집안에서
세계를 꿈꾸다

안정된 아버지의 직장으로 인해 그는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이 성장했으나 아버지가 교직을 일찍 떠나 사업을 시작하면서 가계는 기울기 시작했다. 또한 부친은 회사 경영의 미숙으로 사업은 실패로 돌아갔고 화목했던 집안은 근심과 걱정으로 휘청거려야 했다. 그런 결과로 그의 행복했던 학창시절은 사라지고 생계를 걱정해야 할 상황까지 도래했다.

그는 그 당시 차비 5원이 없어서 1시간30분 거리를 걸어 다녀야 했고, 큰 가방을 들고 왕복 3시간을 걷자니 어린마음에도 너무 힘이 들어 차비를 벌기위해 여름에는 아이스하드 장사를, 방학 때는 크레용 만드는 회사에 다니면서 힘들게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성장할 시기에 그는 생활의 독립을 해야 하는 이중고로 성적은 이미 앞에서 멀어져 있었다.

대학진학 즈음 어렵게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였기에 대구를 떠나 타지로 유학은 생각조차 못했다. 등록금도 어렵게 마련한 처지였기에 생활비까지는 그에게 사치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르바이트로 등록금을 마련하며 대구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종합무역상사인 한일합섬 의류수출사업본부에 근무하게 됐다. 그 당시는 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시기였지만 상사인은 상용여권으로 세계의 선진국을 방문하는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어 영문학을 전공한 그에게는 기회였다.

그는 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80년대 초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느낀 것은 우리나라의 위상이었다. 우리나라를 알아주는 외국인은 드물었고 일본사람과 일본 상품은 인정받는 현실에 그의 가치관은 차츰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업은 생계를 위해서지만, 언젠가는 국가를 위해서 올바른 정치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처음 먹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정치를 해서 우리나라를 잘살게 하고 전 세계에 알려야겠다는 꿈이 강하게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플루타르그 영웅전과
이순신

그는 책을 좋아 했다.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읽고 독서광이 되었다. 그가 읽은 여러 책 중에 아우렐리우스 로마 황제가 전쟁터에서 까지 읽었다는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3일 만에 읽고 다시 한 번 확고한 정치에 신념이 생겼다. 이 책은 중앙대 김병철교수가 8권으로 번역한 고전으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역사와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는 이순신 장군을 가장 존경한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정신이 살아있다고. 일본사람에게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국민들은 최소한 ‘난중일기’를 한번쯤을 읽어봐야 한다고 조언해 주고 있다. 그는 ‘난중일기’를 읽어봄으로서 극일정신뿐만 아니라 어려운 일이 닥쳐와도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사업을 하기까지

직장에서 인정받고 있던 그는 젊은 기분에 이대로 월급쟁이로 사느니 사업을 한 번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대기업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1년 만에 모든 재산을 날리고 실업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부친이 사업실패로 어려움에 처해 있던 어린 시절에 자신이 아르바이트하며 차비와 학비를 벌었던 시절을 회상하며 자신만 믿고 있는 가족들에게 가장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사업에 실패하자 그 당시 느꼈던 절망감과 암담함이란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었고 앞으로 살아갈 인생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처음으로 절실하게 느꼈다고 한다. 실패를 통하여 많은 것을 얻은 그는 그 전까지 전혀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내면의 덕목과 생활에 대한 바른 태도와 자세 그리고 깨달음을 통하여 자연의 이치와 사물의 원리를 배우는 소중한 시간들을 가질 수 있었다. 높은 온도에서 담금질 되어 만들어진 철이 크게 그리고 많이 쓰임을 받듯이 그 또한 책을 읽는 습관이 만들어 졌고 어떤 일을 하던 아침에 항상 5분전에야 일어났던 게으른 삶이 믿음을 가지면서 5시 새벽기도를 참석하게 되었다. 그때 시작한 새벽 조깅을 통하여 건강을 회복하고 마침내 마라톤 풀코스를 4번이나 완주하게 된 이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시도했으나 그에게는 오직 가진 것은 가방 하나였다. ‘이제 무너지면 다 끝장이다’하는 심정으로, 실패를 통하여 담금질 된 자신을 믿고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의지하면서 무에서 다시 재기에 도전하게 되었다. 그는 그 당시 자동차산업이 앞으로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물이 될 것이라는 것을 감지하고 외국잡지에 발표된 자동차부품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외국 논문을 번역하면서 부족한 지식은 자동차부품회사와 수리공장에서 습득하고 자신의 지식으로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기업을 창업하고 경영하는 과정에서 숱한 어려움을 만난 그는 그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믿음으로서 또 지혜로서 극복해 나갔다. 기업이 승승장구하던 2004년에 옆 공장에서 난 불이 그의 공장을 덮쳐 공장이 전소되고 말았다. 그는 그 당시 소방법 때문에 옆 공장에서 불이나 옮겨 붙었지만 보상하나 받지 못했고,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로 인해 중국에서 수입하던 제품의 가격이 원화환율상승으로 인해 한해 40억 가까이 손해를 보면서도 그 위기를 극복하는 경영자가 되었다. 그가 사업을 재기하는 데는 그의 신뢰가 뒷받침되어 있었다. 그의 공장이 전소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직원, 협력사 관계자들, 목사님과 교우들, 친구, 친척 등 많은 분들이 달려와 그의 근심보다는 먼 훗날 간증거리가 되도록 하나님이 시험하는 것이라고 위로해 주었고 그가 힘들고 어려울 때는 협력사에서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했다면 그에게는 재기와 성공은 없었을 것이다. 항상 낮은 자세와 겸손이 오늘의 그를 만들어 주었는지도 모른다.

제 2의 고향인
군포 지역 섬기기

그는 사업과 종교생활을 하면서 배움에 대해서도 게으르지 않았다. 배움이 부족하면 늘 남만 탓한다는 부친의 말씀에 그는 한양대학교 산업경영대학원 경영학과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한양대학교 일반대학원 전략경영학과에서 박사학위까지 받는 학구열을 보여주었다.

그가 추구한 사업이 안정되자 그는 이웃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았다. 그래서 교회에서 운영하는 복지관을 처음 찾았고 그때 그는 어르신들의 복지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복지관의 후원회에 가입하여 후원을 시작한 것이 동기, 동산복지재단에서 운영하는 노인복지관의 후원회장을 맡아 어르신복지에 남다른 애정으로 봉사에 전념하게 되었다. 또한 동산교회에서 실업인선교회 회장으로 소외계층 후원, 청소년시절을 어렵게 보낸 기억 때문에 방과 후 교실, 개척교회 후원, 선교사 후원 등 자신이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곳에는 경제적으로 후원을 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정책자문위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중앙상임위원, 군포 밝은 세상지역사회학교 운영위원, 군포 노인복지관 자원봉사회 봉사회원, 성남법원 조정협의회 조정위원, 한?중 정책포럼 운영위원, 군포발전전략연구소 소장 등 지역과 사회를 나눔과 섬기는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봉사와 희생은 자신을 버려야하고 그러한 정신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의 의기투합에서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

군포를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며 지역발전 모델을 꾸준하게 생각하고 설계해왔던 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군포발전연구소”를 뜻을 같이하는 분들과 창립하여 살기 좋은 도시, 정감이 넘치는 도시, 낙후된 곳을 새롭게 창조하는 일들을 시민들과 함께 하면서 걸어가고 있는 금병찬대표를 보면서 군포도 그를 통해 새롭게 변화되길 기대해 본다.

 

※금병찬 대표는

■ 경북 칠곡출생
■ 한양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박사
■ 새누리당 중앙당 부대변인(현)
■ 동산실업인선교회 회장(전)
■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정책자문위원(전)
■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중앙상임위원(전)
■ 성남법원 조정협의회 조정위원
■ 포럼 ‘오늘’ 운영위원
■ 군포발전전략연구소 소장
■ 우진폼테크(주)대표이사
chanho227@ilyoseoul.co.kr 

박찬호 기자 chanho227@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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